책리뷰/언어의 온도 (이기주)
언어의 온도 후기
이런 류의 소설은 전에 한 번 접해본 적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가 떠오른다. 이런 책은 마치 영혼의 가죽 일부를 떼어내 요리하는 느낌이다. 같은 경험이라도 저자의 관점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고, 그 고유성이 곧 책의 힘이 된다.
언어의 온도 역시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야기를 끌어내고 붙잡아 늘려내는 게 신기했다. 어떻게 보면 흔하고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저자는 그것을 하나의 장면, 하나의 생각으로 엮어내 따뜻한 글로 바꾼다. 저자처럼 산다면 하루하루가 게임 같지 않을까? 다만 여기서 얻는 보상은 전리품이나 골드가 아니라, 일상의 의문점 하나씩이다. 어떤 날은 하나, 어떤 날은 여러 개. 그렇게 살아간다면 인생이 더 길고 풍성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노래 가사와도 닮아 있다. 따뜻하고 공감되는, 마치 포장마차 우동 국물 같은 친밀감이 있다. 읽다 보면 발라드 노래나 10CM 노래 같은 느낌이 든다. 술술 읽히고, 혈관 끝에서 끝까지 따뜻해지는 묘연한 감각이 퍼진다. 각 챕터가 짧아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금방 읽고 덮어버릴 수도 있고, 시간 없을 때 틈틈이 읽기도 좋다. 그러다 보면 ‘나 오늘도 꽤 읽었네’ 하는 뿌듯함까지 따라온다.
가장 인상적인 챕터는 “라이팅은 리라이팅”이라는 이야기였다. 어느 날 후배가 저자에게 묻는다. “선배님, 글쓰기란 무엇이죠?” 저자는 대답한다. “글쓰기는 고칠수록 빛나는 법이다. 글쓰기는 리라이팅이다.” 그 구절을 읽는 순간, 나는 보석을 깎는 장면이 떠올랐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들은 적이 있다. 보석은 깎는 방법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고.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다이아몬드 모양은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인데, 그게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동시에 가장 많이 깎이는 방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더 비싸다. 글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계속 다듬고 다듬어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 그게 글쓰기 아닐까.
그렇다면 나에게 글쓰기는 뭘까? 확실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내겐 글쓰기는 감정을 소모하고 이성을 드러내게 만드는 도구 같다. 예를 들어 보자. 바 아이스크림이 내 생각이라면, 아이스 부분이 감정이고 나무 막대 부분이 이성이다. 나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감정을 마구 쏟아낸다. 아이스크림을 베고 부수고 깨무는 것처럼 글로 감정을 털어낸다. 그렇게 다 하고 나면 막대만 남는다. 그 순간 나는 쭈그리고 앉아 그 막대를 들여다본다. 감정이 날아간 자리에서 남은 건 이성뿐이고, 그제야 생각한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 올바른 답은 뭘까?” 그 고민이 결국 나를 넓히고 성장시키는 촉매가 된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를 드라이기에 비유하고 싶다. 감정을 빨리 증발시켜 주고, 그 과정마저 눈에 드러나도록 해준다. 덕분에 감정이 사라지는 걸 더 뚜렷하게 보고, 느낄 수 있다. 머릿속으로만 감정을 소모하려 하면 감정의 원천과 핵심을 찾을 수 없어서 곤란하다. 중요한 건 감정을 날려버리는 게 아니라 원인을 찾는 것이다. 녹아내린 아이스크림도 고이 모아둬야 한다. 거기에는 여전히 무구한 가치가 담겨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글쓰기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하다. 나처럼 감정과 이성을 다루는 도구로 쓰는 사람도 있겠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글쓰기를 더 넓게 사용하고 싶다. 소설을 써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보고 싶고, 내 주장을 전해 누군가를 설득하는 마이크처럼 쓰고 싶다. 생각해 보면 글이 닿을 수 있는 자리는 너무 많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한 글을 쓰고 싶다면, 먼저 다양한 글을 읽어야 한다.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나온다. 답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언어의 온도는 그런 점에서 내게 많은 걸 남겨준 책이다. 글쓰기에 대한 내 관점을 조금은 더 명확하게 해 줬고, 동시에 더 넓게 열어주기도 했다. 앞으로 나는 글을 통해 감정을 정리하고, 세상을 이해하며,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