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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연대기

2024년 아르코 문학창작 발표지원 선정작가의 시-이어진

by 이어진

이 여행의 시작은 너였다 수없이 해를 굴리며, 나는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고 언덕 위의 아름다운 들꽃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피어나고 있었고 나는 피고 지고를 반복하였고 눈물 없이는 언덕을 넘을 수 없다는 바람 부는 그곳에서, 너는 피리를 불고 있었고


나는 지워지면서 다시 생겨나고 다시 흩날리면서 다시 뿌리내리고 있었고 언덕은 언덕으로 길을 안내하고 있었고 나는 너의 근원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너의 뿌리를 네가 걸어온 길을 네가 걸어갈 길을 들길처럼 낮게 주저앉아서

커다랗게 고여 있는 길옆의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서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니?

파랗게 나무들이 내 키를 넘어 솟아올랐고

너는 그 나무 위에 올라가 구름을 휘저으며 사과를 따고 있었고

사랑이라는 실체를 그리워하다가 죽어버릴 주인공처럼 너는 위태로워 보였고

여태 너는 우리가 헤어진 그곳

그 호수 안에 누워 흘러 다니고 있었고

나는 흘러 다니는 너를 추억하고 있었고

비가 내리는 날을 그리워하자

처음 보는 빗방울이 나에게 뛰어와 우산을 건네주었다

아름다움의 실체는 네가 다 가져가버렸으니

우리 이제 세상의 모든 언어를 물속 깊이 수장시키기로 하자 너는 중얼거리고 있었고 손가락을 펴고 날아오르는 안개의 춤이 호수 근처의 풀들에게 박수를 받고 있었고


너의 하루를 들여다본다 너의 어제를 그제를 그 전날을, 그 전전날을, 수없이 날아다니는 너의 환영을 거리의 우동 집을 사거리 꽃집에서 꽃을 들고 서있는 너의 웃음을


고여 있다가 흘러가다가 어느 날 문득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지느러미들


수없이 많은 눈물을 쏟아부었던 구름의 계단을 내려와, 너는 나의 손가락 끝으로 다시 헤엄쳐 올 것이다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언덕의 한 편에서 피어나고 있는 꽃무더기, 그 환한 꽃무덤 속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너의 눈동자를 지극히 사랑할 것이다 내가 나의 지느러미를 애청하듯이 우리는 바람으로 흔들리다가 다시 바람을 뚫고 나아갈 것이다 바람이 순한 쪽으로 불어간다는 정설을 오늘은 믿어보는 것이다 그물이 햇살을 찢어 금빛 물고기를 푸른 하늘 위에 무한정 펼쳐놓고 있으니


두 눈을 물속 깊이 집어넣고 가만히 앉아 있어 보는 것이다

흰 구름의 양말이 사뿐사뿐 물 위를 걸어 다닐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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