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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눈동자 안의 시

2024년 아르코 문학창작 발표지원 선정작-이어진

by 이어진

사과 눈동자의 깊은 웅덩이가 좋아서 그 웅덩이의 묘한 물빛이 좋아서 오늘은 사과 눈동자 안의 시를 조금만 인쇄합니다 사과 눈동자 안에 살고 있는 물고기와 푸른 잎사귀와 그 푸른 약속 위에 매달린 작은 물방울들, 사과의 경이가 되어 주는 사과나무 잎사귀들, 그 빛나던 맹세들, 유월의 금빛 구름들, 여름의 파란 더위가 철창을 세워 사과 근원의 고독을 허물어뜨리고, 사과의 불안한 심장을 쥐고 휘청거릴 때, 사과는 눈을 감고 저기 물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조그만 물방울들의 시를,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는 푸른 종아리의 풍경을 조금만 인쇄합니다 지구의 눈동자에서 꺼낸, 그 풍요로운 물속의 세계를, 그 입속의 갖가지 식물들의 리듬을, 사과의 손처럼 파란 여름날의 생각들을, 책상 위에 꺼내 놓고, 아주 조금만 이 사과의 경이를 인쇄합니다

내가 지나온 사과의 세계를, 검은 구름 속의 사과의 언어들을, 한 획 한 획의 날씨들을, 죽죽 금을 긋던 사과 마음속의 나무껍질들을, 환희에 들뜬 수액의 표정들을, 파랗게 흔들리며 마중 나오던 여름의 초록들을, 백지 위에 펼쳐 놓고 한 땀 한 땀 인쇄합니다 사과 눈동자 안의 깊은 슬픔이 좋아서, 사과 눈동자 안의 맑은 냄새가 좋아서, 갸웃거리던 웅덩이, 검은 나뭇가지의 웅덩이, 검은 밤의 웅덩이, 검은 활자의 웅덩이, 숨 깊은 사과의 언어를 조금만 인쇄합니다 사과 눈동자 안의 시, 그 빛나던 순간의 그 짧았던 고백들, 사과처럼 매달려 내 언어의 숨소리를 백지 위에 조금만 인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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