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정체성을 더욱 공고하게, 단단하게!
서비스 기획자로 산지 언 2년 하고도 3개월이 됐다. 3년 차라는 작고 소중한 연차에 비해 비교적 큰 과제를 매니징 하게 됐다. "이제 내 실력을 보여줄 때가 왔다!"며 호기롭게 과제를 진행해 나갔으나, 과제는 생각보다 힘겹게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억누를 수 없는 압박감과 중압감을 서서히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나는 번아웃을 맞이했다.
[번아웃 burnout] ; 어떠한 활동이 끝난 후 심신이 지친 상태. 과도한 훈련에 의하거나 경기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아 쌓인 스트레스를 해결하지 못하여 심리적ㆍ생리적으로 지친 상태이다.
번아웃의 사전적 정의이다. 1) 어떠한 활동이 끝난 후 심신이 지쳤거나, 혹은 2) 활동 과정에서 과분한 일을 겪거나 혹은 3) 과제 과정에서 해결되지 않는 무언가 때문에 심리적/생리적으로 지친 상태를 '번아웃'이라고 부르고 있다. 내가 번아웃을 겪게 된 원인은 특히 3)의 이유 때문이었다. 자세히는 말하자면, 내가 맡은 과제의 방향성을 뾰족하게 잡고 이끌어나가는 것이 버거웠던 탓이었다.
내가.. 번아웃이라니..
내가 담당한 과제는 기존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던 기능을 새로운 기능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탑다운으로 떨어진 과제였지만, 원활한 진행을 위해 주어진 과제를 '왜' 해야 하는지의 <Why 당위성>을 부여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아무리 탑다운 과제라지만 실제로 이 과제를 구현해 줄 개발/디자인 실무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Why가 명확해야 했기 때문이다.
탑다운으로 내려온 과제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은 굉장히 도 어려운 일이다. 장금이한테 홍시를 먹고 왜 홍시에서 홍시 맛이 나냐고 묻는 거나 마찬가지일 거다. 하지만 서비스의 기획 담당자라면 응당 이것을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 즉, 누군가 나에게 '홍시에서 홍시 맛이 왜 나는 것이냐'라고 물으면 어떤 성분 때문에 홍시맛이 나는지, 홍시 맛은 대체 어떤 맛인 건지, 홍시 맛으로 또 어떤 새로운 맛을 낼 수 있는지 명확한 까닭이나 근거를 바탕으로 A부터 Z까지 빠짐없이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게는 '과제의 방향성'이라고 불린다.
왜 해야 하냐고요? 저도 알고 싶네요?
방향성을 잡는 것, 이론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다들 잘 알 테다. 하나 실제 실행하고 증명해내려 하니 참으로 어려웠다. 이 과제를 해야 하는 '이유'부터, 과제를 해냈을 때 얻게 될 '성과'를 일목요연하게 빈틈없이 설명해야 했다. 나름대로의 이유와 과정을 그려가며 방향성을 잡으려고 노력을 했으나, 아무래도 기존에 '잘' 있던 기능을 변경하고 수정하는 과제였다 보니 모든 사람들을 설득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나 보다.
'위에서 탑다운으로 내려온 업무라서'라고 글 초반에서 밑밥을 깔기는 했지만 이건 표면적인 변명일 뿐. 결국은 프로젝트 담당자인 내가 모든 사람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어야 했지만 결론적으로 그러지 못했다. 프로젝트 진행 이유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프로젝트 담당자로서 모든 사람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죄악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내가 아무리 경력이 길진 않다만, 이 조차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나? 나중에 또 이런 상황을 맞닥뜨릴 때, 그때도 이럴 것인가? 나 스스로에게 취조하듯 끊임없이 질문했고, 스스로의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한 자신에 실망도 했고 지치기도 했다. 경력이 쌓이고 이 나중에도 못 하면 어떡하지. 아니? 나 못할 것 같은데-? 라며 한계에 가두기 시작했고 나를 존중하는 마음이 옅어진 탓에 자존감도 많이 낮아졌었다.
그랬던 내가 번아웃에서 벗어날 수 있던 이유
그렇다고 모든 실무자들이 위 과제에 반대의견을 낸 것은 아니었다. 일부 실무자들은 '우리 잘해봐요!'라고 응원의 말을 불어넣어 주었지만, 소수의 실무자들은 과제 실행 도중까지 과제에 대해 의문점이 있는 상태였다. 이 어렵디 어려운 과제를 맡기 전까지는 이미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된(혹은 공감대를 만들기도 힘들지 않던) 과제를 주로 맡다 보니, 이번처럼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운 과제가 더욱 힘에 부쳐 능히 당해내기 어려웠을 법도 하다.
그렇게 서서히 스며들 듯 번아웃이 왔다. 그동안은 단순 스트레스로 치부하며 나 스스로를 위로거나 보살피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레 치유될 거라 믿으며 멍-하니 있었는데 업무 생각을 머리에 넣는 순간 눈물이 줄줄 흐르는 걸 보며 그제야 번아웃이 왔음을 깨달았다. 아니, 더 이상 번아웃이 왔음을 모르는 채 하고 회피하지 않고 '인정'했다.
번아웃이 왔음을 깨닫고 난 후 혼자 있으면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하고, 평소 의지하던 동생을 만나서 내 상황과 문제들을 털어놓았다. 긴 시간 이야기를 하다가 동생과 책방에 들렀는데, 동생이 내 상황과 잘 맞는다며 책을 추천해주었다. 편집자인 동생이 추천해주는 책이기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책을 골라 들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 정리도 없이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쳤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 레몬심리 지음, 박영란 옮김
첫 장을 읽자마자 "이거 약간 몰래카메라인가?! 이거 완전 나한테 필요한 내용들 이잖아!"를 머릿속으로 외쳤다. 그리고 나는 하루 만에 완독 했다. 어찌나 집중했던지 책 챕터가 끝날 때마다 내 생각도 같이 적어내려 갔다. 친구랑 대화할 때 공감되는 부분이 있으면 '맞아, 맞지. 너는 그랬구나? 나는 이랬어. 우리 이랬네' 하며 짝짜꿍 수다 떨듯이, 책이랑 수다를 한참이나 떨었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내용들은 주로 아래와 같다.
기분이 태도로 발현되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이 현명한 성인이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 마음 놓고 행동하자. 주변 사람 의식하지 말고.
자아정체성을 명확히 가지고 있어야 외부에서 압박을 받았을 때에도 타격이 크지 않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 사람인지 명확히 알아두자. 남들이 뭐라고 해도 I don't care 할 수 있게
사람의 마음은 같지도 않고 공평하지도 않다. '너 같은 애 처음 봤어!'라는 말이 당연하다. 나는 세상에 하나니까 나 같은 애는 처음 보는 게 맞는 거지.
그러니까, 세상 사람은 다들 생각이 다르다. 그래서 나의 행동이나 결과물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내가 해낸 결과물이 뛰어나고 엄청나다고 응원해주는 사람도 있을 테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짧은 사이에 참 많은 감정의 영역을 오갔다. "이게 뭐라고- 아니 진짜 이게 뭐라고!" 기획 일을 그만둬야 하나 싶기도 했고, 내가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 생각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라는 책은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안내서가 되어주었다.
책에서는 본인의 자아정체성을 명확하고 공고히 가지고 있어야 외부나 회사에서 압박을 받았을 때에도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내가 번아웃이 온 데에는 일을 제대로 못 해냈다는 죄책감도 한 몫했지만, 그 보다는 실무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들었던 반대 의견이나 혹은 부정적인 의견들이 나라는 사람에 대한 지적이나 비난의 화살로 느껴져서 스스로를 더욱 쓸모없고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오판해버렸던 것 같다. 자아정체성이 너무나도 약했어서 회사에서의 나와, 실제 삶을 살아가는 나를 동일시하며 스스로를 더욱더 갉아먹었고 그것이 곧 번아웃으로 돌아오게 되지 않나 싶다.
완독 후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결론은 해피엔딩-
세상 사람은 전부, 각자, 모두, 대게 다르다! 처음부터 이 일을 잘 해내고 논리적으로 남을 설득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어느 정도 시뮬레이션도 해보고 충분한 생각을 거쳐야 논리력이 발산되는 스타일이다! 회의 중에 협업 파트의 리더들이 당장에 원하는 답, 방향성을 내놓기 에는 아직 한계가 있는 주니어지만 나의 충분한 고민 끝에 나오는 결론은 모두가 합의할 만한 이유 있고 근거 있는 결과물이라고 자신한다.
그러니까 기죽지 말자. 찰나의 순간 때문에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스스로를 갉아먹지 말자. 외부의 압박에 타격받으며 휘청거리지 말자. 외부 작용이 오더라도 힘차게 막아내며 원래의 궤도로 돌아가자. 내 중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