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키노오스의 정원에서 내 손바닥까지
여름은 과일 천국이다. 햇살을 머금은 과일들은 저마다 빛깔과 향기를 뽐내며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작은 주머니 모양의 보랏빛 과일이었다. 통통하게 영글어 오른 무화과가 눈에 들어온다.
꼭지를 달고 있는 모양새가 흡사 흥부전 속에서 보물이 쏟아져 나오던 박 같다. 겉은 보랏빛으로 수수한 색이지만 속을 열면 오돌 토돌 한 보랏빛 보석처럼 빛나는 씨알들이 촘촘히 자리한다. 작은 보물창고를 여는 것 같은 기분을 준다.
추운 겨울을 지나 따뜻한 온기를 맞는다. 새싹을 틔운 잎사귀 사이 어느 센가 초록 열매가 달리기 시작한다.
무화과(無化果)를 한자로 풀어 보기로 한다. 꽃이 피지 않고 열리는 열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를 검색해 본다. "봄철 여름에 걸쳐 옆 겨드랑이에서 꽃바침이 항아리모양으로 비대해져 내벽에 흰빛이 작은 꽃이 빽빽이 달리며 숨은 꽃차례를 이룬다 꽃바침이 비대해져서 열매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 백과>
겉으론 꽃이 피지 않는 듯 하지만 그 속에는 이미 흰빛 작은 꽃이 빽빽이 달려서 결국 초록빛 열매가 차오른다. 숨겨진 꽃이 열매가 되어 드러나는 그 순간, 우리들은 비로소 과일 속에 계절을 본다.
실제로 다른 과일들과 다르게 이 나무는 꽃을 보기가 어렵다. 눈으로 보기가 어려운 탓인지 꽃이 피지 않고 과일이 맺는다는 내용을 담은 책을 본 적이 있다. 박지원이 북경으로 가는 길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남긴 <열하일기>에 나와있었다. 그가 북경으로 가던 중 여태 보지 못했던 나무에 대한 글이었다. "잎은 동백 같고 열매는 탱자 비슷했다. 꽃 없이 과일을 맺기에 무화과라고 한다"는 글을 남겼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는 무화과나무가 없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나무는 18세기 후반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호메로스 <오뒷세이아>에서도 무화과가 나온다. 오뒷세우스가 본 파이아케스왕 알키노오스의 궁정 정원에는 계절에 구애받지 않는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달콤한 무화과나무(........... ) 키 큰 나무들의 열매는 겨울이고 여름이고 일 년 내내 바닥이 드러나거나 부족한 적이 없었으니 (.........) 무화과는 무화과 위에서 익어간다." (7권) <오뒷세이아> 호메르스 지음, 천병희 옮김
호메로스가 노래한 알키노오스의 정원에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무화과가 영글어 있었다. 그것은 신들의 축복
과 풍요로움이었을 것이다. 무화과는 인간의 입에만 달콤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사시사철 무화과를 영글게 한 것은 신들 또한 그 단맛을 탐하였기 때문 아닐까.
신은 인간과 동일시되는 것은 금기였다. 어쩌면 무화과의 달콤함은 불멸의 존재가 필멸의 존재에게 베푼 느 그러 움이었을까. 필멸의 존재로 사라질 운명을 지닌 인간이 잠시나마 불멸의 기쁨을 맛보도록 허용된 작은 단서, 그것이 바로 무화과의 단맛이었으리라.
조선의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이 낯선 과일을 기록하여 당시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모습을 전해주었다. 이렇게 신화와 기록 속을 오가며 모습을 드러낸 무화과는, 지금 내 손바닥 위의 이 작은 열매가 단순한 계절 과일이 아니었다. 인류가 오랫동안 신의 선물로 여겨온 보물임을 알려준다.
나는 무화과 열매가 지니고 있는 특유한 맛을 좋아한다. 제대로 맛을 알게 된 것은 신혼 때였다. 그 이전에는 무화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혼 후 분가하기 전까지 시부모님과 같이 살았다. 시부모님 댁 정원에는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있었다.
봄이면 넓적한 나뭇잎 사에에 작은 초록 열매가 돋아났다. 분명 꽃을 본 적이 없는데 어느 날 초록 열매가 달려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때도 신기하다는 생각을 한 기억이 난다. 봄이 지나고 한더위였던 여름쯤, 시간과 바람과 비 태양을 먹고 자란 자연의 결정체를 만났다. 자줏빛 무화과 열매가 익었다. 그때 가족 누구도 그 무화과 열매에 관심이 없었다. 지나고 보니 나만 그 무화과나무를 들락거렸다.
당시에도 이맘때였다. 팔 구월쯤, 정원에 있던 무화과나무에는 잘 익은 무화과 열매가 뿜어내는 달콤한 냄새가 정원을 채웠다. 꼭지를 나무에 매달아 있던 자줏빛 주머니 모양을 한 열매가 나무에 달려 있었다. 한 입 넣어 봤다. 순간 오돌토돌한 혀에 감기는 감각이 온 입을 휘감았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 무화과 맛에 빠져 들게 되었다. 그날 이후 나무 한 그루 열매는 나의 것이 되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유심히 무화과나무를 살폈다.
알고 보니 오래전부터 인간과 같이 왔던 끈을 놓지 않고 이어져 왔던 무화과였다. 북경에서 처음 봤던 신기한 나무, 신들이 가까이했던 열매 무화과나무였다. 비바람 햇빛 등으로 뭉쳐진 동그란 자연을 먹는다.
작년에도 올해도 내년에도 동근 박속에 든 진귀한 보석들을 먹는다. 내 손바닥에 놓인 열매 속을 살 짝 열어본다. 붉은 속살이 드러나고 작은 씨알들이 촘촘히 빛 방울처럼 반짝인다. 입안에 넣어 퍼지는 달콤함 속에서 나는 오래전 인류가 느꼈을 경이로움과 조선의 지식인이 호기심으로 적어둔 낯선 무화과를 함께 떠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