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뚜벅뚜벅 걸어온 감
주홍빛 감이 나무에서 대롱거린다. 하루 해가 저물어 가는 저녁시간 산책길에서 만난 감이다. 거의 매일 걷는 산책길인데 갑자기 감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감은 서서히 시간을 채우며 영글어 갔던 모양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해마다 이맘때쯤은 뜨거운 여름을 지낸 초록감은 주홍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감은 초록에서 주홍으로 바꿔 입기까지 많은 시간을 삼켰다. 사계절의 부름에 순응하며 찬바람과 꽁꽁 언 땅 위를 묵묵히 견뎠다. 그리고 봄과 여름을 지나 마침내 주홍빛 열매로 계절의 결실을 보여주었다.
찬 겨울에는 바짝 말라있던 나무가 죽은 줄 알았던 때가 많았다. 그런데 신기하게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연두색 싹이 움을 틔웠다. 그런 모습을 보는 순간 '마른나무에도 그동안 생명의 끈을 이어가고 있었구나'는 생각을 했다. 죽었던 나무로 생각했던 것은, 분명 그때 봤던 나무는 꺼칠한 껍질을 완전히 다 드러내고 조용히 죽은 듯이 서 있던 나무였기 때문이다. 마른나무에서 움을 틔우는 싹을 보는 순간 너무 신기했고, 생명의 소생을 알리는 기쁨이 앞섰다.
주변이 제법 연초록으로 싱그러움으로 펼쳐질 때쯤 감나무에 달려있는 연두색 잎사귀는 제법 무성해졌다. 이때 감나무잎은 다른 나무들과 달리 잎사귀가 넓적하다. 그런 나무잎사귀 덕에 자연히 감나무는 풍성하고 싱싱해 보였다. 감꽃이 피기 시작할 즈음 잎사귀를 유심히 보면 나무 잎사귀 사이로 노란 감꽃이 달려있다. 이때 감꽃은 크기가 작은 종모양으로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걷다 보면 길거리에 감꽃이 떨어져 있었다. 이때 노랗게 길을 덮고 있는 감꽃은 그림붓으로 점묘화를 찍은 듯했다. 이렇게 감꽃을 보낸 자리에 작은 초록감이 잎사귀 사이로 숨어서 그 자리를 차지한다. 서서히 태양이 강해지고 살을 탱탱하게 올린 감은 같은 초록잎색으로 사람들의 눈에서 숨은 듯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여름 더위가 대지를 뜨겁게 데울 때 제법 큰 감이 눈에 들어왔다. 감은 한여름 한낮에는 강한 빛을 발하는 뜨거운 태양을 삼켰다
감나무가 있는 산책길은 여름 내내 매미 울음소리가 요란했었다. 마침 길목에 서 있던 감나무에 열려 있는 감은 매미가 울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어쩌면 감은 여름을 더 즐겁게 보냈는지도 모른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울어대던 매미들의 소리는 합창공연음악회를 열은 듯했다. 그 소리를 듣던 감이 조금씩 살을 찌워 온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샌가 그렇게 지치게 울어대던 매미는 온데간데없이 그들의 세상은 막을 내렸다. 요즘은 귀뚜라미가 대신 그 자리를 채운다. 계절을 흐름에 따라 주변이 변하고 있다. 그 주변을 묵묵히 지키던 감나무에 열린 감나무가 바람에 흔들린다.
감에도 이름이 많다. 단감, 고종시, 수수감,.... 이름만큼이나 맛도 제각각이다. 아삭하고 달콤한 단감이 있는가 하면 오래 익혀야 비로소 부드럽게 달아지는 홍시도 있다. 껍질을 벗겨 겨울 햇살에 말려낸 곶감은 또 다른 맛을 전해준다. 이름이 다르고 쓰임이 다른 만큼 감은 계절마다 각기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감은 한때는 귀한 최고의 간식이었다. 어릴 때 풋감이 열릴 때부터 나는 감나무에 관심이 많았다. 노란 꽃이 필 때는 떨어져 있는 꽃을 주워서 꽃목걸이를 만들며 놀았다. 이때 긴 끈으로 개수를 맞추어 목걸이를 만들었다. 목에 거는 순간 부드럽고 살짝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감꽃이 떨어지는 때는 매일매일 나의 감꽃 목걸이가 바뀌었다.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감꽃 목걸이가 목에 둘러졌다. 시간이 지나 그때를 생각하면 그 목걸이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나만의 창작품이었다. 봄날 그 목걸이를 주렁주렁 목에 걸고 초등학교에 간 기억도 있다. 그때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감꽃을 목걸이로 만들어서 목에 주렁주렁 끼고 학교로 왔던 친구들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동심을 자극했던 감꽃이었다. 그랬던 감꽃은 오랫동안 우리들 곁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었다. 잠시 감나무가 우리들에게 꽃 놀잇감을 베푼 것이었다.
꽃을 지운 감나무는 열렸던 감을 모두 가을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시간이 서서히 지나가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된다. 강한 태풍과 비에 가지가 꺾이기도 하고 또 나무에 달려 있던 감이 떨어지기도 한다. 한더위 여름밤 감 떨어지는 소리로 '툭' '툭'소리를 듣고 잠을 잤던 밤은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에 풋감이 떨어져 깨어지거나 그냥 한 알이 쑥 빠진 듯 땅바닥에 널 부러져 있었다. 이런 것처럼 주홍빛감으로 완성되는 일이 모든 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서 선선한 기운이 돌 때쯤 감은 새로운 변신을 서서히 했다. 반짝이는 표면에 주홍색을 띠고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어릴 때 기억은 그 감을 따려고 긴 잠자리채를 들고 휘둘렀던 기억이 난다. 어쩌다 풋감을 입에 넣으면 그 떫은맛에 고개를 흔들었던 적도 있었다. 요즘은 단감을 좋아한다. 겨울 내내 단감을 즐긴다. 아싹하면서도 달달한 맛은 가을부터 겨울까지 가까이하게 만드는 과일이다. 이제 가을과 겨울이 서서히 오는 것 같다 올해도 어김없이 단감을 내내 먹을 것 같다.
창덕궁 낙선재에 가면 입구에 서있는 감나무가 있다. 가을엔 그 감나무에 달린 주홍색감을 볼 수가 있다. 이 감나무는 많은 사람들에게 눈길을 끈다. 신기하게 초록감일대는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다. 가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주홍감을 매달은 감나무는 제법 멋을 부린 듯 관심을 끈다. 시간이 흘러 늦가을엔 잎사귀를 다 보낸 나무엔 주홍감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해를 담은 감이었다. 해 하나 해 두 개... 많은 해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상상을 해 봤다. 이렇게 많은 감은 주변에 있는 까치들이 겨울을 날 수 있을 정도로 주렁주렁 달렸다. 이때, 볼 수록 감나무는 낙선재의 주인이 된 듯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감나무가 언제 심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궁궐에 심어져 있는 감나무는 또 다른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곳에 서 있는 감나무는 사계절을 낙선재를 지키는 지킴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서울미술관에서 전시되어 있던 오치균작 '감'작품을 봤다.
"내 고향 집 앞마당 가운데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다. 옆마당에도 바깥마당에도 텃밭에도 감나무가 있었다. 봄이면, 유난히 까만 나무줄기에 파릇하게 새잎이 돋아나고 어느새 감꽃을 피워 바람이 불면 마당에 하얗게 쏟아내고 했는데 그때부터 난 감의 떫은맛을 그 감꽃으로부터 느끼곤 했던 기억이 난다. /오치균
그림에 나타나 있는 감은 옛 시골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화풍에 그려져 있던 감나무는 오래된 고목인 듯 굵고 꺼칠한 표면이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주홍빛 감은 생기를 담고 있었다. 그림을 보며 어릴 때 시골집이 생각났다. 들어서는 대문과 뒤뜰에 심어져 있던 감나무가 생각이 났다. 예전엔 어느 누구 집 할 것 없이 집집마다 감나무는 흔하게 심어져 있었다. 이 그림을 봤던 당시는 봄이었다. 감이 주렁주렁 달린 그림을 보며 옛 시골 어린 시절 가을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 그림 외에도 우리나라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감이었다. 또한 서양 화가들의 그림에도 감은 정물화로 등장한다. 그런데 감은 우리나라 시골 정서에 맞닿은 듯하다. 요즘도 전통음식점에서 이름을 '감나무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집은 제법 봤다.
하지만 감은 요즘 세대 어린이들은 별로 선호하는 과일이 아니다. 세상이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요즘 먹거리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외국에서 들어온 과일들을 흔하게 맛볼 수 있는 세상이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입안에서 부드럽게 씹히는 과일들이 많이 있다. 어린이들에게는 감은 별로 주목을 받지 않는 과일이 되었다.
그러나 누구의 관심에 무심한 듯 감은 외롭지만 묵묵히 계절을 잘 받아들이고 순응을 한다. 꽃을 피우고 꽃을 지우고 열매를 맺고 초록빛에서 주홍빛으로 익어간다. 꽃 보다 더 큰 과업을 이룬 열매 맺기는 정말 인생의 최고점이다. 사람의 인생도 다를 바가 아니다. 한 때는 인생의 최고점을 향해 정신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열매를 맺는 순간은 인생의 최고점이다. 이것도 영원하지는 않다. 어느 시점에서 다 내려놓아야 하는 시기가 분명 온다.
이때는 외로움이라는 단절을 알리는 공기가 주변을 맴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자신이 만들어 가야 한다. 이런 과정은 그의 누구나 비슷한 인생의 여정길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밑그림을 잘 그려서 실행을 하며 더욱더 나에게 집중해야 될 보석 같은 시간일 수도 있다. 누가 좋아하지 않아도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최종적으로는 더욱 영근 인생을 만들어야 한다.
산책길에서 봤던 감. 창덕궁 낙선재 입구에서 봤던 감, 서울미술관 오치균작가의 작품으로 봤던 감. 을 생각해 봤다. 요즘 마주하게 된 주홍빛 감은 계절. 시간흐름, 옛정서를 일깨워 준다. 그리고 감나무에 달려있던 감은 혼자서도 계절을 친구로 옆에 두고 사계절을 살아낸다. 지나고 보니 감은 열매를 가지에 달고 언제나 자기의 과업을 이루는 중이었다. 묵묵히 변함없이 잘 익어 갈 뿐이다. 조용히 잘 익어가는 열매를 보며 우리들의 삶도 그저 묵묵히 살아가면 아름다운 주홍빛 열매라는 선물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홍빛 감의 일렁임을 한참을 바라보며 잠시 멈추었던 산책길 걸음을 다시 옮겼다.
< 감> 오치균/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