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미술관을 나와 마요르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그곳 거리에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길을 걷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늦추거나 잠시 멈춰 서서 거리의 공연을 바라보았고 노래가 끝날 때마다 환호를 보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제목은 알 수 없었지만, 표정과 목소리만으로도 분위기는 충분히 전해졌다. 낯선 언어의 노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간중간 박수를 보냈다. 어쩌면 이 도시는 음악이 특별한 시간이 아니라 일상의 한 부분처럼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요르 광장
광장은 그 도시의 심장처럼, 과거에도 지금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고, 아치형 입구 모양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는 이곳은 시장으로, 투우장으로, 종교재판과 왕의 즉위식이 열리던 장소이기도 했다. 축제와 형벌이라는 두 얼굴을 동시에 지녔던 공간이었다. 어느 책에서 언 뜻 읽었던 종교재판 내용은 그 시절 사람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이곳에서도 종교재판이 열렸다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종교가 사회 전반에 걸쳐 공포사회로 치닫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광장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광장에는 펠리페 3세 (1598-1621) 기마상이 보였다. 마요르 광장 건설을 명령한 그는 지금도 광장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현재의 광장 이전부터 사람들이 모이던 곳이었고, 어느 시기부터는 종교재판이라는 살벌한 형벌이 공개적으로 열리기도 했던 광장 중 하나였다. 이때 종교재판은 재산 몰수. 이단이라는 낙인, 화형 등을 통해 행해졌다고 한다.
종교 재판이 한창이던 시절 마요르 광장 근처의 사람들은 일요일마다 자신의 신앙을 의심받지 않기 위해 집안 문 하나까지도 신경을 써야 했다고 한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의 역사는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가 교황 식스토 4세의 허락을 받아 종교통합이라는 목적을 두었다고 한다. 주로 유대인 무어인들 중 이단을 색출했다고 했다. 앞서 지나온 흔적을 보면 이곳은 오래전부터 무어인과 유대인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던 곳이었다. 거리의 건축과 생활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은 이단으로 몰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아래 사라졌을까.
과거 어두운 시대에 하나의 종교만이 강요되었던 광장 주변을 걸어 보았다. 이곳에는 관광객과 현지주민들 이 뒤섞여 있었고, 사람들은 이곳에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역사 속 오래전 어둠대신, 이제는 밝고 자유로운 기운이 이 공간 전체를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