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책길

계절이 지나간 자리

by 글열음


찬 공기가 몸을 움츠리게 한다. 옷을 단단히 입고 산책길을 나서지만, 이때 바깥공기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다. 나는 자동적으로 손을 외투 주머니 속으로 감추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어느새 추위가 한결 누그러진 듯 발걸음도 가볍게 움직였다. 사계절을 휴식 공간으로 찾는 이곳은 나에게는 선물 같은 장소이다.


산책길은 하루 일과 중 쌓였던 피로감을 씻어주는 휴식의 공간이자 복잡한 온갖 생각을 정리하는 데 길잡이 역할을 한다. 언제나 내면의 평온함을 되찾게 해 주는 이곳을 추위와 맞서듯 산책길을 묵묵히 걸어본다. 그러는 사이 온통 주변은 희뿌연 회색빛에 잠기고 고요함 속에서 지나간 시간들이 기억으로 스며든다.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어느 시기에는 붉은 태양의 흔적처럼 태양을 닮은 색들이 주변을 채웠던 때도 있었다.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스쳐간 계절을 돌이켜 생각해 보며 지난봄 여름 가을을 기억 속으로 펼쳐 본다.





먼저 봄 이야기로 들어가 본다.

겨울의 끝자락쯤, 산책길 주변에 흐르던 실개천은 겨울의 얼음을 걷어 내며 이제 갓 깨어난 듯 조용히 흐른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따스한 기온이 차츰 온기를 펼칠 때쯤 만물이 경쟁을 하듯 봄을 알린다. 이때 많은 다양한 종류의 나무, 풀 등은 저마다 본성에 따라 계절을 맞이한다.


나무둥지를 뚫거나 흙 속을 뚫고 뾰족하게 얼굴을 내미는 새싹을 볼 때마다, 나는 해마다 그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단단한 나무와 단단한 흙을 뚫는 산고의 고통을 이겨낸 생명들은 세상 밖을 나온 후부터는 강한 자신감을 얻은 듯 각자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드러냈다.


봄이면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 있다. 어느 날이었던가. 산책길엔 벚꽃봉우리가 가지마다 쭈뼛하게 올라오더니 이내 꽃이 한 잎 두 잎 피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활짝 필까. 아니면 그다음 날일까. 하는 생각이 스치곤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곤 한다. 하루를 지나 평소와 같이 산책길을 들어섰던 날, 밤사이 세상은 벚꽃으로 꽉 채운 듯 요란하게 피어 있었다. 그때 나도 덩달아 기분이 환해지며 산책길은 몇 배의 즐거움으로 평소보다 그 길을 몇 바퀴나 더 돌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아쉽게도 벚꽃은 그렇게 오래 주변에 머물지 않는다. 짧은 시간 동안 피었다 사라진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벚꽃 피는 그 길을 놓칠세라 발걸음을 재촉한 날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바람 불고 봄비가 내리던 날 근처 실개천에는 온통 핑크빛 벚꽃이 물 위를 채웠다.


그러다 주변은 나무와 풀이 서서히 자라서 서로 어우러져 연초록으로 펼쳐질 때쯤, 길 옆 한쪽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길을 따라 한참 걷다 보면 내가 던진 피로를 숲은 넓은 품으로 감싸더니 나에게 새로운 활기를 안긴다.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은행잎, 플라타너스잎. 감잎. 쑥, 내가 이름을 모르는 식물들. 등이 어느새 제법 넓적해진 모양이 눈에 들어왔고, 어느 날은 언덕바지에 피어 있던 튤립까지. 눈에 들어왔다.


계절이 초여름 때쯤으로 기억한다. 찔레꽃 덩굴이 있는 곳 그 지점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춘 날이 있었다. 하얀 무명천 같은 꽃잎 사이로 노란 점을 찍은 듯한 흰색과 노랑의 조화로움과 짙은 향기는 산책길 주변을 맴돌게 했다. 무더기 속에 흰 꽃이 하늘하늘 목을 내밀고 있던 모습은 때로는 흰나비가 앉아 있는 듯. 착시 현상을 일으키게 했다. 코끝을 자극하던 그 냄새는 누구 도 흉내를 낼 수 없는 향기로 단숨에 찔레꽃임을 알아차린다. 해마다 그즈음은 장맛비가 자주 내리던 날이 많았다. 그런 날은 찔레꽃이 눈에 밟혔다. 밤새 비바람이 흔든 날은 어김없이 흰 꽃잎은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곳을 맴돌며 안타까움으로 비바람을 원망했던 적이 있었다.




여기 여름에는 또 어떠했는가... '

여름이면 숲은 해를 향해 쭉쭉 뻗은 나뭇가지와 그 끝에 매달린 잎사귀로 짙은 색은 천지를 초록으로 변화시켰다. 어쩌다 바람이 불면 초록이 일렁거렸다. 이때 잎사귀들이 서로 스치며 내는 소리에 놀라는 새들도 있었다. 나뭇잎이 펄럭이자 가지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던 까치 등이 프드득 소리를 내고 날아간다. 그중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를 보고 신기해했다. 연 보랏빛이 도는 털을 가진 새가 몇 마리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그순간 "이쁜새"라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산책길에서는 그것뿐이겠는가. 여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노래하는 매미가 있다. 열정적으로 노래 부르는 매미는 어떤가. 큰 나무 가지든 작은 나무 가지든 가리지 않고 무대를 정한 듯했다. 이때 매미는 한 두 마리가 아니었다.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지만 길을 지나다 보면 여기저기 나무를 안고 합창경연대회를 하는 듯 보였다. 무대에는 악기 하나 없이 그저 쉴 새 없이 노래를 부른다. 그럼에도 그 소리는 묘하게도 일정한 음률을 타는 듯 와닿았다. 더 나아가 매미는 불빛에 밤을 잊은 듯 눈치 없이 밤새 노래한다. 어찌 그렇게 작은 몸뚱이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궁금해져서 가까이 다가가면 소리를 뚝 거치곤 했다.


비 오는 날 산책길 숲은 어떠했는가. 갑자기 내리는 소낙비 또는 장맛비 내리는 날에도 산책길 숲은 비를 맞으며 마치 춤을 추듯 흔들거렸다. 비 온 후 숲은 더욱 초록으로 반짝거렸다. 주변은 습기로 축축한 기온을 감돌고 있었지만 물기를 마음껏 빨아들인 나무들은 더 싱그러웠다. 초록이 이렇게 아름다울까..,라는 생각에 젖어들기도 했다.


초록의 기운 속에 내가 살아온 시간을 조용히 비추어 보기도 했던 날이 있었다. 돌이켜 보면 분명 나에게도 그런 초록의 시간들이 있었다. 그때 타인이 봤던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또 내가 기억하는 나의 모습은 어떤 기억들로 남아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걸음을 옮긴 날들도 있었다.


지나고 보니 초록은 그 풋풋함이 나에게는 오히려 그리움으로 남았다. 이 숲길을 걷다 불현듯 지난 여름 산책길을 떠 올려 보았다. 푹 찌는 듯한 한 더위 속에서 지상의 뜨거운 열기를 잠시 식혀주고 따가운 햇빛을 가려 주던 짙은 초록 나무의 말없는 베풂 앞에서 문득 고개가 숙여지기도 했다.




가을

하지만 그 초록을 뒤덮고 기세등등하던 산책길 주변도 어느 날부턴가 변화가 소리 없이 찾아들었다. 그 뜨겁고 숨 막히던 더위가 서서히 가라앉을 때쯤, 이런 현상을 눈치챈 듯 주변 나뭇잎들이 서서히 물들어 가는 모습을 보였다. 한때 봄날 벚꽃을 피웠던 벚나무는 이제 붉게 물든 잎사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중 한 잎이 지나가던 바람에 흩날리다가 길바닥에 떨어졌다.


가을바람을 타고 온 서늘한 기온이 나뭇잎을 스칠 때 나무는 잎사귀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이제는 떠나보냄을 알리며, 서서히 휴식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이때 잎은 자연이니고 있는 섭리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듯해 보였다.


걸을 걷다 보면 고개 숙인 벼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시민공원으로 주변 분위기는 대체로 자연적 원시림 같은 분위기의 느낌을 받지만 또 다른 한 부분은 관리를 하는 듯해 보였다. 그중에 논과 밭이었다. 이때 논은 물기가 말라있고 여름 초록사이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벼가 누렇게 익어있다 그 옆 또 따른 곳으로 눈이 갔다 그곳엔 잘 가꾸어진 밭에 노란 호박이 열려 있었다. 풍요로운 가을을 상징하는 가을 곡식이 달린 모습에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는 순간 시골 전경이 수채화 그림 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주변 모습은 아파트가 빼곡한 서울 도심 속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소중한 휴식 공간임을 증명이 되는 듯했다.




여기 겨울은.

추위에 꽁꽁 언 듯 한 겨울풍경은 이곳도 기온은 많이 차다. 얼기설기한 나뭇가지사이로 바람이 가볍게 통과를 하며 그 추위를 이기는 나무가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는 푸른색으로 시간이 지나면 붉은색으로 온갖 치장을 하던 나무는 이제는 그 본래의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다. 그저 회색 껍질로 추위를 막아서고 있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당당하게 봄을 기다리듯 보인다. 이때 묵묵히 서있던 나무는 어쩌다 바람이 불면 부러질 듯 온몸이 휘청거린다. 그러다 제자리를 찾아 멈추는 나무들은 또 그저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다. 이 산책길 주변에 펼쳐진 지금의 회색빛이 나에게는 낯설지가 않다.


봄 여름 가을을 지나왔기에, 나는 그들을 알고 있기에.


봄엔 연둣빛 새싹으로 봄을 알리고, 여름이면 풍성한 숲을 만든 나무들이 그늘이라는 휴식 공간을 내어주었다. 가을엔 더 화려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알록달록 옷을 갈아입고 자신들의 모습을 경쟁하듯 자랑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응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 내일을 기다려 본다.


돌이켜 보면 나무와 숲은 나에게 말없이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공존과 삶의 본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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