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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아무것도 영혼 하지 않다.

by 엘라리

누군가 앞에만 서면 유독 졸아 본 적이 있는가?


내가 나를 안다는 게 쉽지 않다. 유난히 그 앞에 서면 나를 무서워 떨게 했던 사람이 있다. 왜 그랬을까? 내 기억에 유난히 졸려서 말을 못 했던 사람은 대학 기숙사 사감 선생님있었다. 나보다 한 열 살쯤 많았을까? 짧은 단발머리에 경상도 억양이 심한 부산 사람이었다. 그분의 뭐가 나를 그렇게 떨리게 했는지 모르겠다. 키도 나보다 훨씬 작았는데….

어쩌면 몇백대의 경쟁율을 뚫고 과 수석이나 해야 들어올 수 있는 기숙사를 내가 아는 분의 백으로 들어가서일까? 나는 그 분만 보면 말을 못 하고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백으로 들어갔다면 백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오히려 갑질? 을 해야 하는 입장 아닌가? 그때 나는 어렸고, 순진했고, 그래도 늘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당당하고, 하고 싶은 말 다하는 그런 아이였다. 학교 교수님 앞에서도 졸지 않고 할 말 다하던 내가 왜 그분 앞에서만 그랬을까? 그분 한테 야단을 들은 적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살고 보니 본의 아니게 내가 그분 입장이 되었던 적이 많았다는 거다. 내 사업을 하면서 나는 늘 마음이 바빴고, 급했고, 말도 빨랐고, 성격상 늘 당당했지만 내 사업이라 더 당당했고, 내 목소리는 카랑카랑 했고, 나는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고, 내 말은 짧고, 명료했다. 일적으로 할 이야기만 하고, 알아야 할 것만 물었다. 마치 너라는 사람이 일 적으로만 필요 하지 그 이외에 는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그때는 내가 그렇게 보였다는 걸 몰랐다.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고, 시시콜콜 남의 개인사를 묻는 게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고 생각했고, 하는 일이 바빠서, 여유도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나는 개인사에 궁금증이 많은 사람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가 늘 궁금한 사람이다. 그런데 막상 자연스럽게 그들의 일상을 묻고 어떻게 사는지 이야기할 기회가 없다. 일이 있으면 일부터 해 놓고 봐야 하는 성격 때문이다.


우리 딸 고등학교, 학교 행사를 가서 딸의 친구들을 본 적이 있다. 여전히 말이 짧은 나는, 그래도 분명히 웃으며 하이 라고 했는데, 딸이 나중에 말했다. “She is intimidating”.(무섭게 보인다? 한국말로 세 보인다라고 할 수 있겠다.. )이라고 친구가 말했다고. 나는 내가 그런 인상 인 줄은 몰랐다. 알고 보니 나의 첫 이상은 누구에게나 그랬고, 그래도 나중에 알고 보면 허당인걸 알고 사람들은 재미있어한다. 맞다, 나는 두 가지 성격으로 확실히 나뉜다. 심각 모드와 심각하지 않는 모드. 그리고 나는 누군가를 처음으로 대할 때 긴장 한다. 한 예로 우리 집 강아지는 사람들만 보면 무섭게 짖는다. 그래서 산책시키기도 힘들었다. 강아지 훈련을 하는 사람까지 고용했었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근데 조련사 말이 주인을 닮아서라고 했다. 내가 길을 가다가 사람들을 보면 긴장을 하고 그 긴장을 우리 강아지가 느낀다고 했다. 그래서 강아지가 짖는 것이라고, 강아지가 주인을 담는다는 말이 거기서 나온 말인가 보다.


사람은 동물에서 시작 됐다. 나는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살고, 몸은 우리 영혼이 빌려 쓰는 도구라고 생각 한다. 우리 몸은 동물적인 감각이 있고 그 감각은 상대의 기운을 몸으로 느낀다. 긴장했을 때와 긴장하지 않을 때가 확연하게 다르다. 누구 와든 첫 만남은 나를 긴장시킨다. 그런 나는 차갑고, 경직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이 불편 할수도 있다. 저 여자 함부로 하면 안 될 것 같다 뭐 그런, 하지만 친한 친구들과 긴장하지 않고 있을 때는 그렇게 허당일 수가 없다. 나는 엔터테이너 이기를 자처한다. 나의 허점을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걸 안다. 그래서 허점을 일부러라도 보여서 친구들이 웃는 모습을 보기 좋아한다.


사람의 질량이라는 말이 있다. 타고난 질량도 있고 거기에 자신이 인생을 공부하면서 채워지는 질량이 있다. 크게 태어난 사람이 있고 작게 태어난 사람도 있고, 다 똑같지 않다. 많은 직원을 채용하면서 배운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질량 사이즈만큼 만 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쉽게 일할 수 있도록 가리키는 걸 좋아했었다. 작업의 노 하우 같은 걸.. 일이 느린 직원이 있으면 다가가서 이렇게 하면 일이 쉽고 시간이 더 짧게 걸리는데.. 가르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본인들은 그게 힘들고 귀찮았던 것 같다. 처음에는 삶의 피가 되고 살이 될, 이런 중요한 가르침을 왜 그들은 거부할까? 답답했다. 하지만 모두가 잘나고 싶고 유능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안건 오래되지 않았다. 다 삶의 원하는 바가 틀리고 그릇사이즈가 틀리다. 우리가 자식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릇을 키울 수 있다고 하지만 그냥 적당히 살고 싶은 아이들을 닦달해서, 자신이나 사회가 원하는 그릇에 맞추고 싶어 하는 부모들이 있다. 나도 그런 마음을 매일 억누르고 있다 나는 가끔씩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이들에 대한, 혹은 다른 사람의 대한 내 기대를 못 미치는 행동들에 화를 누르고, 마음을 다른 데로 돌려 본다. 그들이 만족하면 그만이다라고 되새겨 본다. 내가 보기에 좋은 삶을 살아 주면 좋겠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삶이고 그들이 깨닫고 실천해 옮겨야 한다. 내가 배운 삶의 노하우는 나한테만 맞는 것이다. 그리고 내 삶이 100 프로 맞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책을 읽고 감명받아 좀 더 잘 살아 주길 바랐지만 책도 읽지 않는다. 요즘은 구글 시대다. 아이들은 궁금한 거 필요한걸, 구글에 서치 한다. 구글이 엄마고 아빠고 선생이다.


누구도 정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인생은 자신이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스쳐 갔던 직원들 중 나하고 일을 하고 배운 게 있다면 그거면 됐다. 세상에 내가 조금 기여를 한 것 같아 서.. 어차피 인생은 누구를 도와주고 도움 받기 위해 태어난 거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건 다 그다음이다.


구글도 AI 도 알고 보면 다 우리의 지식이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시작이고 우리는 우리에게서, 서로에게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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