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라 혼자서도 잘살기
넷플릭스에서 당신이 죽였다를 봤다. 심심해서 시작했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가정폭력을 다루는 이야기였다. 아버지에게 맞는 엄마를 둔 친구, 남편에게 맞는 친구. 결국 두 여자는 남편을 살해한다.
한국은 여전히 부부 사이, 부모 자식 사이의 폭력에 관대하다. 다들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막상 경각심은 없다. 그런 사회에서 어떻게 아내들이, 자식들이 무사할 수 있을까.
미국도 다르지 않다. 어느 나라에나 그런 사람들은 존재한다. 그건 병이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한 번 있었다. 6개월 정도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다짜고짜 내 뺨을 때렸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다가와 내 뺨을 때렸다는 것만 또렷하다. 그날 이후 나는 연락을 끊었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배짱 있어 보이는 애가 아닌데?”
폭력을 ‘배짱’으로 포장하는 말이었다. 세상은 그렇게 폭력에 무감각했다.
그 남자는 울며 용서를 빌었지만, 나는 다시는 그를 믿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도 나는 맞을 수 없다
폭력을 견디는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이유가 있다.
아이들 때문이라거나, 경제적으로 혼자 설 수 없어서라거나, “평소엔 잘해주니까” 혹은 “나를 사랑하니까.”
하지만 그런 부모를 지켜보는 아이들의 마음에는 멍이 생긴다.
그리고 어떤 아이들은 폭력을 전수받는다.
친구를 때리고, 애인을 때리고, 결국 아내를 때린다.
혹은 반대로, 맞는 쪽으로 살아간다.
전남편과 신혼이었을 때, 그는 화가 나서 비디오테이프를 벽에 던졌다. 테이프와 함께 벽이 깨졌다. 나는 단호히 말했다.
“한 번만 더 그러면 이혼이야.”
그 뒤로 그는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친구 사이든 연인 사이든, 싫은 걸 그냥 넘어가면 그 순간부터 병이 시작된다.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관계가 깨질까 봐, 혹은 맞은 게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하고 참는 순간부터 우리는 조금씩 부서져 간다.
싫은 걸 싫다고 말하는 건 싸움이 아니다. 살아남는 방법이다. 그리고 현명하게 공존하는 법이다.
“나는 네가 휘파람 부는 게 싫어.”
“나는 즐거울 때 휘파람을 불어.”
이 두 문장이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진짜 관계다.
타협은 필요하지만, 침묵하며 참는 건 병이 된다. 모른 척하는 것도 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