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 같은 교인이라는 코뚜레
vi) 같은 교인이라는 코뚜레
살기 좋다는 미국에는 지진과 허리케인 그리고 토네이도라는 자연재해가 인명을 위협한다. 유럽과 중동에는 전쟁과 테러가 끊임없고, 인도나 동남아는 태풍(싸이클론)과 홍수가, 일본에는 지진, 중국에는 살인적 스모그가 있다. 이렇게 사람 사는 모든 곳이 엄청난 자연재해와 인재에 공포를 느끼지만 브라질에는 자연재해와 전쟁이 없다. 과연 브라질 사람들 말대로 교황은 옆 나라 아르헨티나 출신이지만, 신은 브라질 출신인 게 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브라질에는 자연재해도, 사자, 호랑이 같은 맹수도 없다.
1996년 초 H 사는 그 넓은 땅에서 신(神)이 한 명만 사는 브라질이 아닌 인도, 즉 엄청나게 많은 신이 살고 있으며, 무덥고 가난한 그러나 우리 조상의 고향 같은 나라에 자동차 공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난 ‘땅’ 전문가로서 그 프로젝트에 처음부터 참여했다. 우선 인도에 날아가서 정부의 협조를 요청하고 전국의 땅을 물색한 후 천신만고 끝에 남부의 첸나이 시 외곽에 부지를 확정하였다. 그 땅을 보러 가던 첫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한국의 토지개발공사 같은 정부 기관의 차를 타고 갔다. 전 날 서류를 검토해 보니 그 땅은 4번 고속도로 옆에 붙은 땅이었다. 소가 도로 한가운데 태평하게 누워서 되새김질하고 있고 그 사이사이 동네 아이들이 뛰어노는 길을 한 시간 정도 비틀비틀 달리고 있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할 시간이 한 참 지난 것 같아 정부 사람에게 4번 고속도로는 언제 나오냐 물어보니, 대답이 우리는 이미 고속도로 위에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무슨 고속도로가 중앙선도 없고 소와 양이 그 위에 누워있다니……
그런 고속도로 30Km를 장장 한 시간 반 동안 달리고 달려 겨우 공장 부지에 도착했던 것이다. 땅 넓이를 내 발로 쟀다. 보폭 76cm를 기준으로 해서 가로, 세로 부지의 크기를 재서 그 경계를 말뚝으로 표시하고 그 65만 평을 빨리 사달라고 주 정부에 요청했다. 등기부 조사 결과 땅 주인은 자그마치 2,000명이 넘었다. 여기서부터 주정부와의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난 프로젝트 진행상 6개월 내 그 땅을 모두 수용해서 우리에게 넘기라고 했고, 산업성 장관은 땅 주인이 2,000명을 넘으니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했다. 빠르면 3년 내에 다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본사에서는 무조건 6개월 후에 공장 건설 공사를 시작해야 한다는 강한 입장을 나에게 전달해 왔다. 여기에서 ‘까라면 까는’ 군대 정신, 아니 H그룹 특유의 강인한 불도저 추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산업성 장관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선물을 내밀어 보았다. 그가 청백리라서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같이 술을 먹자고 했다. 술을 못하는 크리스천이라며 거부했다. 시간은 가고 해결 방법은 없었다. 어느 날 토요일 저녁, 답답한 마음에 잘 아는 변호사 집에 불쑥 찾아갔다. 그는 파괴의 신이자 수많은 힌두교 신 중 서열 4위인 ‘Eshwar’를 내 인도 이름으로 지어 준 사람이었다. 내 고민을 들은 그는 산업성 장관은 인도에서는 보기 드문 청백리에 독실한 크리스천이니 그 사람이 다니는 ‘성당에 같이 나가서 친해지는 수밖에 없다’라는 엄청나게 값진 어드바이스(Advice)를 주었다.
그다음 날부터 난 내 상관인 법인장을 모시고 매 일요일마다 성당으로 나갔다. 둘 다 난생처음인 성당이었지만 오래된 신자인 척했다. 어설프게 성호를 긋고 무릎 꿇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며 ‘아멘’을 따라 했다. 미사가 끝난 후에 친교의 시간에 장관을 꼭 만났다. 그로부터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는 성당에서의 친분을 가지고 그 장관실에 약속도 없이 수시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정부 산하 기관에서 늦장 부리는 것을 그에게 낱낱이 고자질해가면서 속도를 내도록 푸시(Push)했다. 그 결과 3년 후에나 착공 가능하다는 땅을 애초 계획대로 6개월 만에 반을 사들여 일단 건설 공사를 착공했고, 1년 안에 나머지 땅도 다 사들일 수 있었다. 산업성 장관도 놀랬다. 그는 기적이 일어났다며 아멘을 외쳤다.
그 외에도 공장 건설에 따른 여러 가지 인허가를 위해 법인장과 나는 그가 장관으로 재직한 3년 동안 그 성당을 다녔다. 이열치열이라고 더운 나라이지만, 우리는 일요일 새벽 5시에 만나 6km 구보를 하고 아침 식사 후 성당에 나갔다. 미사 중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얼굴을 괴고 눈 감고 하는 기도 시간에 우린 아주 꿀 같은 단잠을 즐겼다. 새벽 운동 후 고단했기에.
긴 기도 후 헌금 바구니가 돌았다. 대나무로 만든 조그만 소쿠리 같은 헌금 바구니에 지폐를 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동전만 몇 개 딸랑딸랑 들어온다. 내가 준비해 간 100루피짜리 지폐를 넣으면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보았다. 최초의 지폐이며 우리 집 메이드 반 달치 월급이니까. 잠에서 선잠 깬 법인장님은 지갑을 열어 500루피를 집어넣는다. 내 운전수 반 달치 월급이다. 헌금 바구니를 들고 있던 사람이 더 이상 돌 필요 없이 바로 신부님께 가지고 가서 헌납한다. 내가 법인장께 말씀드렸다. 우리가 너무 많은 금액을 내서 위화감 조성하는 것 같으니 다음부터는 조금씩만 내자고. 그랬더니 법인장께서 화를 내시며 말씀하셨다. “인도 사람들은 헌금을 내면 되지만 우린 숙박비를 내야 하잖아!”
내 청춘과 열정이 고 소란히 묻힌 인도! 난 거기에서 코뚜레 낀 황소처럼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그 청백리 산업성 장관 덕분에 인도 공장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그는 청백리라서 자유로웠지만, 같은 교인이라는 코뚜레에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