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렜던 순간들,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꾹꾹 담던 순간들, 서로의 다른 점 마저 매력이고 장점이라 여기던 순간들, 서로를 동일시했던 순간들.
“우린 천생연분이야!”
하늘이 응원해 주는 사랑이 분명하다며 우리의 만남은 그 어떤 사랑보다 순수하고 고결하다 여기던 순간이 있었다.
주는 걸 아끼지 않았고, 재고 따지지 않았다. 작은 선물에도, 깜짝스런 방문에도 감동받고 사랑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주는 만큼 받지 못하고 있단 걸 깨닫고,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고, 작은 실망들이 쌓이면서 이젠 더 이상 사소한 것에 설레거나 고맙지 않다. 상대의 사소한 말에 공감보단 분석을 하게 되고, 서로의 다른 점을 답답해 견디지 못한다.
“이 사람은 나와 많이 달라.”
이젠 다름이 보인다. 한결같이 설레고 감사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맙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도 서글프다. 우리의 만남은 과연 하늘이 응원해 주는 사랑이 맞을까? 이대로 서서히 식어버릴 흔하디 흔한 만남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어쩌다 여기까지 와버린 걸까. 착한 상대방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매일 하는 내가 죄스럽다. 권태라는 감정이 너무도 얄밉다.
우리의 첫 순간들을 곱씹어보기로 했다. 사실 난 이 모든 것들을 알고 만났다. 사랑하는 감정에 휩싸여 그것마저 사랑스럽게 여겼을 뿐. 그는 원래 그랬고 나와 다른 점이 명확했다. ‘그’라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그가 나를 위해주는 마음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가는 길은 관대하게 생각하고 그에 대해선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은 둘이 하는 건데, 그는 그저 작고 소박한 걸 좋아하는 한결같은 사람인데, 평화로운 사랑에서 오는 권태를 견디기 어려웠나 보다.
인간의 체온은 36.5도이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다. 미지근한 건 맛이 없다. 카페에 가도 메뉴엔 ICE와 HOT만 있지, 미지근한 음료는 없다. 우린 차갑고 뜨거운 것에 적응되어 버렸다. 하지만 차가운 물이나 뜨거운 물보다도 체온과 비슷한 미지근한 물이 몸에 가장 이롭듯 자극적이지 않은 무색무취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가 언제나 한결같이 나를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은 그 어느 짧고 강렬한 사랑보다도 강한 믿음과 확신을 준다는 것을 기억하기로 했다.
자극적인 사랑은 쉽다. 하지만 그 강렬함도 언젠간 적응이 되기 마련이다. 그 이상의 자극을 느끼려면 더 강한 자극을 찾아야 한다. 이는 마약에 중독되는 과정과도 같다. 더 큰 자극을 찾지 못한다면 매일 겪던 소중한 일상은 권태와 우울로 가득한 비극이 돼버린다. 결국 우리를 오래도록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건 ‘미지근함’이다. 나는 이 미지근한 남자를 더욱더 사랑하기로 했다. 눈에 띄게 드러나는 사랑은 아니지만 그 속에 갈수록 깊고 진해지는 사랑의 농도는 우리 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니깐.
이 사실을 받아들이자 신기하게도 그는 여전히 그대로지만 그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다시 원래대로 커졌다. 혼자만의 길었던 두 달여간의 방황이었다. 그는 여전히 처음과 같이 나를 사랑한다. 내 방황을 알리 없는 그는 여전히 따뜻한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권태. 그것은 잘 가고 있는 우리에게 꼭 한 번은 오는 감정이다. 이 감정을 잘 반추하고 극복해 낸다면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평온하고 깊은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더 견고해지고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이번 생은 처음이니까. 이런 사랑도 처음이니까. 혼란스럽고 힘든 건 어쩔 수 없는 과정이다. 단, 이것이 과정이 아닌 마침표가 된다면 우린 끝없이 같은 과정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이란, 더 나은 것을 쟁취하기 위해 맹렬히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들에 대해 돌아보고 곱씹어보는 여정이 아닐까. 반복되는 삶에서 권태를 느낄 수 있는 것도, 더 많이 성장할 수 있는 축복의 씨앗일 지도 모른다.
‘어서 오세요. 권태의 과정으로 입성한 걸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