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바라는 마음이 생기면 어려워지는 게 인간관계인가 보다. 내가 베푸는 것과 타인이 내게 베푸는 것을 비교하는 순간 관계는 불편해진다. 상대방은 절대 나와 같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심 바라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챙겨주고 싶은 마음의 정도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내가 챙겨준다 해서 상대방이 무심하면 서운해하는 것은 모순이란 걸 잘 안다. 그저 묵묵하게 나는 나대로 타인은 타인대로 자연스럽게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정 많고 사람 좋아하는 나는 그게 참 어렵다. 아직 성숙한 어른이 되려면 많이 멀었나 보다.
세월이 흐르고 직업이 달라지고 주변 사람도 달라지다 보니 어느덧 ‘비슷해서 가까워졌던’ 친구들이 ‘달라서 멀어지’고 있다. 지금 보면 이렇게 다른데 어쩌다 가장 친한 친구가 됐나 싶다.
소모적 인간관계
가족과 떨어져 혼자 오랫동안 지내다 보니 갈수록 사람이 참 그립다. 그래서 더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싶고 그러다 보니 거는 기대감도 큰가 보다. 내게도 친한 친구들이 몇 있고 자주는 아니지만 한 번씩 만나 근황을 신나게 털고 오곤 한다. 그때 얻은 에너지로 한동안 또 힘을 내서 혼자 일상을 잘 버텨내는 식이다. 그런데 갈수록 각자의 사정으로 점점 보는 횟수가 줄어들다 보니 한번 만나는 게 쉽지 않고, 오랜만에 보면 더 기대가 돼서 그런지 만남 후엔 왠지 모를 공허함과 실망감이 든다. 친구들의 에너지가 예전만 하지 않다 보니 내가 더 열심히 에너지를 쓰고 온다. 일도 힘들고, 쉬는 날 시간을 내서 만나니 체력도 힘에 부칠 것이다.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게 느껴지니 씁쓸하기도 하고 이런 게 어른인가 싶어 서글프기도 하다. 바삐 살다 보니 결이 많이 달라졌다.
사람마다 관계 욕구의 정도는 다 다르다. 나는 관계 욕구가 많은 편이다. 만나는 것도, 연락하는 것도 즐겁고 정을 주고 싶고 받고 싶다. 공교롭게도 내 주변 친구들은 대체로 관계 욕구가 적은 편인 것 같다. 함께 하는 것보단 혼자만의 휴식을 선호하고, 관계에 대한 기대치가 없다 보니 관계에 애써 힘을 빼지 않는다. 하필이면 주변이 다 관계 욕구가 적은 사람들이다 보니 혼자 서운하고 외롭고 또 ‘그럴 수 있지’ 하고 이해하는 식이다. 주변 사람들은 평온한데 나만 출렁이는 파도 같다.
사실 요즘의 나는 서운함과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인간에 대한 기대치가 파사삭 무너져버린 상태다. 내 딴에는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라 친구 간의 ‘최소한의 도리’를 바라는 건데 이것마저도 대단한 걸 바라는 것처럼 돼버린 것 같아 참 서운하다. 가끔 필요한 관심을 가지는 것, 했던 말을 기억하는 것이 이제는 그렇게나 힘들어졌나 싶다. 소통을 하다 보면 실망할 일도 많다 보니 늘 ‘참을 인’을 수없이 머리에 새긴다. 왜 이렇게까지 해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모르겠단 생각까지 든다. 나만 신경 써 주고 애쓰는 것 같아 서운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나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는데.
중년의 어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연락 자체에 피로를 느껴 가끔 근황이나 주고받지 사사로운 연락을 꾸준히 주고받진 않는다고 한다. 심하면 메신저 앱을 지워버리기도 한다고 한다. 인간관계에 대해 신경 쓰지 않게 되고 오히려 훨씬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다. 그 심정이 딱 이해가 가는 중이다. 기대도 실망도 하기 싫고 신경 쓰기도 싫다. 꾸준히 연락하지 않더라도 잘 살겠거니 생각하다 한 번쯤 만나고 싶을 때 연락하는 게 좋겠다 싶다.
나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
나는 몇 시간이고 이 주제 저 주제 넘나들며 떠드는 것을 좋아한다. 대화하다 보면 혼자서는 생각지 못했던 부분까지 생각해 볼 수 있고 결론이 나지 않더라도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후련하고 재밌다. 내 의견을 듣고 상대의 의견을 듣는다는 것은 나의 표현에 대한 ‘반응’이므로 대화를 하면서 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게 좋다.
내 주변은 이젠 더 이상 스스로를 표현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이 많다. 될 수 있으면 자기를 숨기려고 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말의 무게를 느끼게 되고 리스크를 안기 보단 안전하게 자신의 평판을 유지할 수 있도록 ‘떠드는 것보단 침묵’을 택한다. 그러다 보니 소통에 무뎌지고 타인에 대한 관심도 사라지고 진심을 전하는 게 점차 어려워지고 서툴러진다. 예전엔 함께 마음껏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갈수록 그런 상대가 줄어드는 이유이다. 정말 다행히도 내겐 이럴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아빠. 뭐 해?”
“응. 점심 먹고 있다.”
급하게 약속을 잡고 기차표를 예매했다.
아빠를 생각하면 먹먹하고 갑갑할 때도 있지만, 존재에 대한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내 유일한 말동무이기에 한편으론 고맙고 든든하기도 하다. 먹먹하고 갑갑한 이유는, 아빠가 일하지 않고 노령연금만으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딸 입장에선 유일한 소득인 노령연금으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옛날 세 가족이 함께 살던 때와 비교되면서 너무도 속상하지만 아빠는 그렇게 사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풍족하지도, 앞으로가 보장된 삶을 살고 있지도 않지만 매일 책을 들고 축축한 흙길을 맨발로 걸으며 자연인처럼 유유히 살고 있다.
부모님은 내가 어릴 적부터 갈등이 잦았다. 큰 다툼 후엔 아빠는 늘 집을 나갔다. 어린 나는 아빠가 나를 두고 머리 깎은 중이 되어 산에 들어가 버릴까 봐 늘 불안에 떨어야 했을 정도로 아빠는 ‘깨달음’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아빠의 영향을 받아 나도 어릴 적부터 겉으로 보이는 사사로운 것보다는 삶의 본질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내 유년 시절은 아빠와의 그런 깊은 대화로 꽉꽉 채워져 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이 복잡하고 고민이 있을 땐 어김없이 아빠를 찾는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내 얘기를 진심으로 듣고 같이 깊게 생각해 주는 정말로 고마운 존재다.
아빠와 이야기하다 보면 해답이 절로 나온다. 내가 원하는 걸 타인에게서 바라면 안 된다.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나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서운하고 외롭던 마음이 한결 좋아졌다. ‘무(無)’라고 생각하니 기대하고 바랄 게 없어졌다. 내가 원하는 걸 해줄 사람은 원래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나를 가장 많이 알고 좋아하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영원한 존재는 바로 나다. 나를 두고 남에게서 그 모습을 찾으려 하니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타인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나를 좀 더 믿고 사랑해 주기로 했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힘이 든다고 외치면 더 세게 껴안아주기로 했다. 되지 않는 것에 고통스러워하지 않도록 억지로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때론 편히 쉴 수 있도록 외부로부터의 소음을 차단해 주기로 했다. 이젠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진정한 친구가 몇이나 남았을까 하는 외로운 질문은 더 이상 되뇌지 않기로 했다. 친한 친구들이 더 이상 내 기대를 충족하지 않더라도 좋다. 내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텅 빈 마음이 온기로 가득 찬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