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Five Vibes

내 인생의 런(run), 나는 달리고 싶다

by 크리스틴

추석 연휴를 앞둔 어느 오후에 비가 살짝 내린 급경사 내리막길을 잰걸음으로 내려오다가 오른쪽 발목뼈가 골절되고 인대가 파열되었다. 아, 이게 무슨 일인가? 내 인생에 뛰는 일은 없다며 언제나 조심조심하며 초록불이 10초 넘게 남았어도 뛰지 않던 내가 한순간의 방심으로 주저앉아 일어나질 못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았고 무언가 끊어진 느낌과 통증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연휴를 앞두고 있어서 겨우 찾은 병원에서 뼈가 부러진 것을 확인하고 수술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고개를 흔들며 부정하였다.

“수술 안 하고 나을 수는 없나요?”

그러나 어쩌랴? 어렵게 수소문하여 휴일에도 수술하는 병원에서 다음날 수술받고 집으로 돌아온 지 채 10일이 지나지 않았다. 한 다리로 지지하며 목발을 짚는 것도 어렵고 부은 다리의 통증 때문에 이틀 정도는 정신이 없었다. 휠체어를 대여할까도 고려했으나 책상 앞에 두는 회전의자에 앉아 수술한 다리는 들고 한 발로 밀며 이동하기로 하였다. 처음에 요령이 없었던 나는 욕실에서 나오며 의자를 먼저 지지하거나 잡지 않고 앉으려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좌절하였고, 고관절까지 망가지면 안 된다는 내면의 소리가 올라올 땐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은 아직도 붓기가 남아 있지만 양손에 잡은 목발에 힘을 주며 실내를 걸어보면서 조금씩 나아짐을 확인한다.


내게 이런 시간이 필요한 걸까? 인생 10월을 기대했다고나 할까? 분주할 예정이던 시간이 멈추며 말을 걸어왔다.

“너무 노력하지 말고 다 하려고도 하지 말아요.”


천재적 달란트가 좀 있는 줄 알다가 성인이 된 이후에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고는 나는 매사에 더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거의 피곤한 상태로 생활했고 매일의 퇴근길에서 비슷한 성향의 동료들과 한결같은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도 빈틈없이 불태웠다. 내일 봐요.”

딸들의 학창시절 시험 기간에는 겸손하게 구석구석 빈틈없이 공부하라고 안달을 하였다. 왜 그랬을까? 돌아보니 애들이 피곤했을 것 같아 미안할 때도 있다. 이제는 편안하게, 여유 있게 삶을 누리는 법을 내가 먼저 제대로 배우면서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발로 걷는 동영상을 보고서 큰딸은 “아고, 아기사슴 밤비네.” 라고 했지만, 지금 혼자 외출할 수 없고 뛸 수도 없으며 걷는 것도 거의 걸음마 수준이란 걸 잊고서 그냥 걸으면 될 것 같고 나가서 뛸 수도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불의의 사고나 그밖의 이유로 걷거나 달릴 수 없는 어떤 분들은 나와 같이 착각하거나 상상하지 않을까 싶다. 아주 쪼금 이해의 폭을 넓히며 ‘내 인생의 런, run’이란 주제를 받자마자 떠올랐던 내 인생의 ‘베스트 런’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오~래 전에 근무했던 학교에서 ㅇ군은 계주 선수로 나설 만큼 달리기가 빠른 학생이었다. 얘기해 보면 금방 착하다는 걸 알 수 있는 친구인데 왜 그런지 반항기도 가지고 있었다. 두발 자유화 이전이어서 머리 규정이 있었는데 잘 지키지 않고 학생부의 단속을 피하며 제법 긴 머리를 하고 다녔다. 어느 날 학생부 선생님이, 본인이 그 학생을 불러서 지도하면 삭발을 시켜야 하는데 어떻게 하겠냐고 물어오셨다.

나는 “담임이 지도하겠다.”는 쪽을 선택하고 종례 후 "ㅇ은 선생님에게로 오라.”고 하였다. 학생도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었다. 대화에 수긍했고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았다. 그런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ㅇ이 가방과 신주머니도 두고 실내화를 신은 채로 뛰어나가 도망치는 게 아닌가? 뒤따라 나가 잡으려고 헉헉거리며 운동장을 계속 돌게 되었고, 많지 않았지만 몇몇 학생들이 보고 있었다.

‘저러다가 교문 밖으로 나가버리면 큰 일인데.’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르지만 숨이 차서 포기하려고 할 때 ㅇ이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기진맥진한 담임교사는 녀석을 잡을 수 있었다.

다시 교무실로 간 나는 머리를 밀 수 없었다. 바리깡을 써 본 적도 없어서 더 주저되었다. ‘선생님이 머리 한쪽만 요만큼 자를 테니까, 미용실이나 이발소에 가서 잘 깍고 오라.’고 하면서 한 줌을 잘랐다. 그리고 요즘 보면 그리 길지도 않은 머리카락 한 줌을 들고 나는 눈물을 글썽였고 녀석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ㅇ은 다음날 학교규정이 요구하는 머리모양으로 등교하였다.

나는 그날 교문 밖으로 도망가지 않은, 이제는 중년을 훌쩍 넘기고 있을 녀석 ㅇ이 정말로 아주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그날 달리기 기록을 쟀다면 아마 좀 괜찮았을 것 같다.

몇 주 후면 나는 더 조심하며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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