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내 인생이 하나의 긴 시리즈물이라고 생각한다.
시즌마다 주제가 바뀌고 등장인물도 달라졌다. 어떤 시즌은 코미디였고 어떤 시즌은 눈물의 드라마였다. 때로는 다음 회 차를 미루고 싶을 만큼 벅찬 날도 있었지만 이야기는 언제나 이어졌다. 누군가는 중간에 채널을 돌렸을지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이 작품의 주연이자 작가로 남아 있다.
시즌 1은 부모님의 보살핌 아래 살았던 10대부터 20대까지의 시절인데 이 시절은 ‘설렘의 시절’ 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알고 싶었고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다. 내가 커서 어떤 사람이 될지 기대가 되었고 궁금했다. 그때의 나는 세상이라는 낯선 세트장을 온종일 뛰어다녔다. 때때로 대사는 자꾸 틀리고 동선은 엉켜 있었지만 그 서투름 속에 존재하는 순수와 가능성이 있었다.
‘달리다’라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던 시절 있었다. 나는 리허설 없는 삶의 무대 위에서 매 장면을 전력으로 살아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렇게 살아야만 젊음에 펄떡이던 나의 열정을 소진할 수 있었다. 실패조차 장식처럼 빛나던 어쩌면 인생의 오프닝 시퀀스 같은 시절이었다.
시즌 2는 조금 더 현실적이었다. 대략 30대부터 50대 중반까지의 시절인데 삶의 무게가 대본 위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인물들 사이에는 갈등이 생겼다.
이야기는 복잡해졌고 편집되지 않은 감정들이 화면 가득 흩어졌다. 그 시절 나는 종종 ‘이 드라마를 계속 찍어야 할까’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바로 그 혼란 속에서 진짜 서사가 자라나고 있었다. 호의가 적의가 되어 돌아오는 때도 있었고 사회생활과 인간관계가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던 시절이었다. 그러면서 취향과 선호가 더욱 뚜렷해 졌고 누굴 옆에 두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을 멀리해야 하는 지도 알게 되었다. 일을 하면서 각자 완성도의 차이가 생각보다 클 수도 있다는 것과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회사생활을 하다보면 본의아니게 일과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도 생길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불안과 후회, 실패와 성장 — 그 모든 감정이 한데 얽혀 나라는 인물의 깊이를 만들어주었다.
시즌 2의 나는 ‘달리기’보다 ‘버티기’를 배웠고 완주보다 ‘지속’을 배웠다.
이야기의 긴 호흡을 견디는 법, 그리고 침묵 속에서도 리듬을 잃지 않는 법을...
지금 나는 아마 시즌 3쯤에 서 있는 것 같다.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는 첫 시점.
이야기의 속도는 느려졌지만 대신 풍경이 더 또렷하게 보인다. 예전엔 속도를 잃으면 실패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멈춤조차 이야기의 일부임을 알게 되었다. 늘 영원할 것 같았던 젊음도 사그라지고 자신했던 체력도 내리막을 향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뜻하지 않은 병마와 싸우게 되었다. 달리는 장면보다 잠시 숨을 고르는 장면이 더 많아졌다고나 할까. 그건 게으름이 아니라 인생을 천천히 감상하려는 태도다.
시즌 3쯤 되니 이제는 다른 누가 써준 대본이 아니라 내가 직접 써 내려가는 서사를 살고 싶다. 화려한 결말보다 진실한 문장 하나, 그게 내 인생의 다음 run이기를 바래본다.
‘런(run)’이란 단어는 단순한 달리기를 뜻하지 않는다. 그건 한 시즌을 견디고 끝까지 살아내는 시간의 리듬이다. 때로는 주저앉고 때로는 되돌아가더라도 그 모든 장면이 모여 인생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완성한다고 믿는다.
인생의 시즌은 언제나 예측 불가하고 다음 회 차의 대본은 아직 비어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크레딧이 흐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야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이야기의 결말이 코미디가 될지 긴박함이 더해진 서스펜스가 될지 감동스런 대하드라마가 될지 그건 주연과 대본을 맡은 나의 몫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나의 run. 시즌 3의 러닝타임 속에서 나는 오늘도 한 장면을 찍고 있다. 언젠가 이 시즌이 마무리될 때 그 모든 run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져 있었다는 것을 조용히 깨닫게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