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한다

손은 거들뿐

by 오아린

하루치 스트레스 해소는

오백 원 네 개로 충분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교복 치마를 휘날리며

여중생 두 명이 불 켜진 판 위에 오른다.


두 손을 뒤로 빨간 봉을 움켜쥐고

철컹철컹-

발짓으로 동그란 디스크를 넘긴다.


등 뒤로 사람들이 좀 모였는지 웅성거리니

로션만 바른 꾸밈없는 얼굴들 위로

수줍은 듯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친구야, 오늘은 이거다.


(가사)

웃기지 마라

우린 그저 끝난 것뿐인데

이 세상이 내게 대체

뭐가 또 두려워

-펌프 인기곡, 노바소닉의 <또 다른 진심> 中-


방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화살표를

놓칠세라 부지런히 발을 놀린다.


차오르는 흥을 느낀다.




90년대, 게임에 관대했던 가정에는 DDR이 있었다. 해외에서 들어온 신종 리듬 게임에는 낯선 팝이 수록되었다. 연결된 화면 속 내려오는 화살표 박자에 맞춰 콩콩 매트를 밟으며 춤을 추듯 노는 오락이었다. 지금처럼 층간소음이 이슈가 되는 시대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집안에서 쿵쿵거리는 것은 아파트 생활 사정상 오래 이어질 수 없는 유행 조건이었으리라. 곧이어 전국에는 그 후속 버전인 한국 오락실 안성맞춤형 PUMP가 깔리기 시작했다. 바운스가 잘 들리는 한국가요가 탑재되었고 춤판은 늘 그렇듯이 구경꾼이 있었다. 신나게 밟을 수 있도록 철판 틀에 강화플라스틱 발판을 메우고 화려한 불빛까지 장착했다. 뒤편에 안전바도 달렸다.


펌프의 등장 이후로 매일 오락실을 다닌 나와 친구는 원더걸스나 샵의 노래처럼 사근사근한 여자그룹 노래로 시작해, 나중에는 노바소닉 같이 우악스러운 락 밴드음악의 비트를 밟을 만큼 실력이 일취월장하였다. '우리가 신났으면 된 거야'라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무대에서 내려오면, 뒤로는 실력자들이 줄을 지어 더 현란한 발놀림을 보여주었다. 스트레스만 풀고 집에 가려던 발걸음이 고수들의 재주에 사로잡혀 휘둥그레진 눈을 감을 새도 없이 그 자리에 꼼짝없이 묶이고 마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등 뒤로 손을 돌려 안전바를 잡고 뛰는 우리와 달리, 실력자들은 안전바를 잡기도 하고 놓기도 하였다. 손을 놓지 못하는 꼴이 스스로 우스워 한 번씩 놓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리듬이 빨라져 화살표가 폭주하듯 내려올 때 그들은 손잡이를 잡았다. 발이 미끄러질까 봐 의지하는 것일까. 안전바를 잡을 때 그들의 몸과 발의 기울기는 사선이었다.


사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몸을 기울인 채 시작하는 운동이 많다. 스피드 스케이팅이나 달리기 출발 지점, 하물며 씨름까지. 선수들의 발을 보면 사선으로 디딘 채 준비를 한다. 그것은 바로, 박차고 밀고 나가기 위함이다. 다음 스텝을 위한 사선이다. 몸이 수직으로 서 있으면 들어오는 힘을 버티지 못해 쓰러지기 쉬우며 바로 이어져야 할 다음 자세가 어렵다. 떨어지는 다음 화살표를 보고 적시에 밟기 위해서는 계산된 움직임으로 미리 디뎌내야 한다. 그러니 사선이다!


-뒤에서 하이클리어를 친 후에 앞으로 언더클리어를 치러 오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요?

-스텝 연습을 더 하세요. (바닥을 차고 나가야 해)


-갑자기 떨어지는 드롭은 어떻게 받을 수 있나요?

-발을 빠르게 움직여야죠. (박차고 나가야지)


-머리 넘어 대각선 끝으로 날아오는 셔틀콕을 초심자도 커버할 수 있는 건가요?

-미리 중간 자기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면 힘들죠. 한시도 가만히 있을 틈은 없습니다. (큰 폭으로 바닥을 차고 따라가야지)


우문현답인데 다 같은 답이다. 발, 발, 발!!! 스텝 연습을 하라. (뿌엥. 그걸 왜 몰랐지)


발이 느려 놓치는 수많은 셔틀콕이 있다. 답답하여 이유를 찾고 또 찾다가 스피드 스케이팅, 달리기, 씨름... 그리고 펌프 오락까지 생각이 꼬리를 늘어뜨렸다. 재밌는 것은 펌프 발판에 새겨진 네 개 방향의 화살표가 배드민턴 스텝 방향에도 적용된다는 사실. 인간의 두 발은 앞을 향하도록 생겼지만 어디로 날아올지 모르는 셔틀콕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발끝을 바깥으로 열고 전방위 공수비에 철저히 대비한 풋워크 연습이 필요하다. '사실 배드민턴은 그게 다예요.'라는 말도 들었다.


단, 코트 위에는 안전바가 없다. 사선으로 차고 나갈 때 선수의 몸은 어디에 의지하는가. 그것은 눈을 깜빡이는 속도로 발로 땅을 짚는 스플릿 스텝이다. 나아가고자 하는 쪽으로 발 방향을 틀며 아주 민첩하게 착지하는 것. 바닥에 발이 닿은 직후에는 나아가려는 쪽의 반대 발로 땅을 밀어내야 한다. 그래야 나머지 발로 펜싱선수가 앞으로 나아갈 때처럼, 또는 뒤로 물러날 때처럼 성큼성큼 재빠르게 몸이 쏘아지듯 순간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이 더 일어서거나 낮아지는 수직의 방향이 아니라, 배꼽의 위치는 되도록 고정한 채 가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해야 낭비가 없다. 오징어가 먹물을 쏘며 옆으로 쭉- 헤엄치듯이. 사선으로 박차는 힘을 받아서 넓어 보이는 코트를 구석구석 누빌 줄 알아야 한다. 도저히 못 받아낼 것처럼 떨어지는 공이나 홈런처럼 머리 뒤로 날아가는 공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이 스플릿 스텝(축지법)을 잘 이해하고 써야 했던 것이다.


정확한 스트로크(팔동작)는 정확한 풋워크(발동작)가 위에 성사되는 것이었다. 그간 나는 사상누각의 스트로크로 얼마나 애를 썼던가.


어쩐지 왕초심을 탈출하는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 팔을 어떻게 쓰는지 유심히 보던 내 눈은 어느새 선수들의 발로 확장되었다. 배드민턴은 실로, 발로 하는 운동이다. 발로 코트를 누비는 놀이다.




수많은 화살을 좇아

멈출 줄 모르고

바닥을 밟아대던

중학생 시절의 잊었던 흥이 다시금 피어오른다.


(가사)

Tonight is the night

funky music is the night

Oh do you wanna funky music

everybody funky music...

-펌프 인기곡, 클론의 <Funky Tonight>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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