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성의 추억

도파민 그리고 아모르파티

by 오아린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속 일시 정지된 듯한 순간들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흥분하여 환호성을 질렀고,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좀처럼 감정 기복이 티 나지 않는 사람이지만, 입을 꾹 닫고 몸을 가만히 있기 힘든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지면 몇 초간은 나도 나를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얏!"

"크악--!"

"으아---!!"

"꺄아아---!!!"

"아이야----!!!!"


발 동동.

가위손 삿대질.

두 팔 벌려 만세.

제자리 한 바퀴 턴.

바닥에 털썩 주저앉기.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찾았던 경마장.

처음으로 마권이라는 것을 사봤다. 복권처럼 생긴 종이를 손에 들자 묘하게 들뜨기 시작했다. 새로운 경험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남자는 만 원, 오천 원 칸을 골고루 찍었고, 여자는 단 오백 원을 들였다. 사람들은 말과 기수가 그려진 잡지 같은 것을 너도나도 들고 있었다. 승률과 말의 혈통을 정리한 배팅 족보였는데 그것 또한 매표소에서 판매되었다. 우리는 초짜답게 그런 숫자에 의지하지 말고 말을 실제로 보고 확인하자며, 시합을 준비 중인 말들이 모여있는 밖으로 나갔다. 구별하기 쉽도록 열 마리 정도가 색깔이 모두 다른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남편은 몸집이 가장 크고 다리가 긴 1번 빨간 마스크 말을 골랐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을 것 같지 않은 몸집이 가장 작고 색이 예쁜 8번 분홍 마스크 말을 선택했다.


유료 자료를 보고 말을 고른 사람들도 대부분 남편과 같은 말에 배팅한 것 같았다. 경마는 빨리 달리기니까 아무래도 근육이 잘 발달된 말이 잘 뛰는 것은 맞다. 그래서 높은 확률로 승리가 점지되었다. 대신 불 보듯 뻔한 결과는 배당금액이 배팅률에 반비례하므로 낮게 책정된다. 이러나저러나 경마장에서 일확천금을 얻을 리는 없으니, 작은 몸집이 짠해서 마음이 갔던 8번 말에게는 소액을 기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화창한 하늘 아래, 노련한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말과 기수를 소개한다. 1번 말, 2번 말, 3번 말... 10번 말 모두 쇠창살 안에 기수와 함께 준비되었다. 준비-땅!! 다그닥 다그닥 에너지 가득한 말발굽 소리를 기대했건만, 시작과 함께 사람들의 고함소리에 눈이 질끈 감겼다. 정신 차려보니 멀어져 가는 말 엉덩이만 보였다. 아, 그런데 역시나 분홍 마스크는 확실한 꼴찌다. ('핑크'야 힘내!)


다시 내가 서있는 관중석 앞으로 말들이 지나갈 때 이번에는 조금 잠잠해진 관중석 덕분에 말들의 경쾌한 발소리가 들렸다. 놓칠세라 핑크를 찾는다. 처음보다는 달리는 말들의 무리에 가까워져 있었다. 핑크는 가장 끝에서 꼴찌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장했다. 오백 원으로 격려해 준 보람을 느꼈다.


한 번 더 눈앞을 지나가면 곧 결승라인이었다. 말 무리가 멀리서 다가오자 다시 주변이 환호성으로 귀를 마비시킨다. 그런데 응원하던 '내 말'이 보이지 않았다. 꼴찌 그룹에 없어서 혹시 중간에 포기했나 싶었다. 남편이 옆에서 시끄럽길래 선두 그룹을 보니 그가 배팅한 말과 2등 말이 일등 자리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왓 더, 핑크! 내 핑크가 끝이 아닌 뒤에서 세 번째 자리에서 갈기를 휘날리며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우와아아아!!) 나는 마치 오백만 원을 건 여자처럼 아저씨들 함성을 제칠 만큼 크게 소리를 질렀다. (끼아아아아!!) 떨리는 비명에 응답하듯 내 말은 바로 내 눈앞에서 7등을 제치고 6, 5, 4등을 지나 앞으로 치고 나간다. (숨멎.) 그대로 분홍 엉덩이, 아니 분홍 마스크의 내 멋진 말은 3등이 되었다가 2등... 오 마이 갓... 1등!!!으로 결승지점을 통과했다. (팔짝팔짝 난리법석.)


배팅에 성공한 사람은 드물었다. 점프점프하는 나, 그리고 드문드문 다섯 명쯤 되는 아저씨들이 우우에엑(믿을 수 없지만 기쁘다)같은 괴성을 지르며 반응하였다. 83배의 배당률이었으니 족보를 움켜쥔 채 찍소리도 내지 못하는 자들의 싸한 반응과, 실수로 잘못 찍은 듯한 자들의 소화되지 않는 환호성이 나올 수밖에.


처음부터 오백 원이 아니라 오천 원을 걸었으면 대박이었겠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내 배당금을 보여주며, 오늘 정말 신이 났다고 두 손을 가슴에 모아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것은 내가 어른이 되어 경험한 인생 첫 희열이라 해도 좋을 짜릿한 감정이었다. 살면서 소리 한번 크게 내 본 적 없는 내가 지른 함성소리, 콘서트장에서도 뛰지 않던 내가 제자리에서 방방 뛰던 기쁨은 낯설고도 그리운 것이었다.




이제는 목이 트였다고 해도 좋을 만큼, 배드민턴을 칠 때마다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그것은 가끔 돼지의 소리, 공룡의 소리, 파이터의 소리, 중국말 같은 기합소리 등으로 표출된다. 꼭 성공의 신호는 아니었다. 돈을 딴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잃은 사람도 있는 것처럼, 게임에서도 이긴 사람이 있으면 반대로 진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이기면 이긴 대로 신이 나고, 지면 진 대로 분해서 재미있다. 그 모든 감정의 극한에는 *아모르파티 감성의 괴성이 튀어나온다. (*내 운명을 사랑하라.)


나의 흥분한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 아린 씨 그렇게 안 생겼는데..."(아니, 저도 사람인데요.)

"누님, 욕을 하셔도 됩니다."(그렇다고 욕은 하지 않습니다.)

"눈 그렇게 뜨지 말라고."(집중하는 중입니다만.)


아, 혹시 글을 대충 읽는 독자가 있을지 몰라서 밝혀둔다. 이 글은 도박 중독에 관한 것이 아니다. 심신건강에 유익한 배드민턴의 즐거움에 대한 글이다. 단, 중독 부분에서는 완전히 부정할 수 없음을 밝힌다. 그것은 모든 공놀이에 반응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도파민 효과이다. 쿵쾅쿵쾅 심장이 뛰고 희로애락 감정이 요동치는 인생운동이다.


민턴족들은 서로를 신기하게 관찰하며 말한다.

"저것 봐. 졌는데도 웃고 있잖아."



screenshot.115.jpg 세상의 모든 분홍말을 응원한다. Amor F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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