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크리스마스이브 때면 만나는 친한 모임이 있다. 언니네 부부와 우리 부부 그리고 우리 부부를 소개한 친구네 부부다. 부부 모임이 아니어도 같은 동네에 살기에 우리 세 여자는 자주 만나 속 이야기를 나누는 각별한 사이다.
어쩌다 우리 셋은 중년의 나이에 각자 다른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에서 중문학을 전공한 언니는 직장을 그만두면서 한자와 관련이 많은 명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평소 성격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성격 심리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우리들의 친구 인희는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렇게 우리 셋은 중년의 나이에 서로 다른 새로운 신념을 지니게 되었다. 나름 한 주장 하는 우리는 만나면 각자의 신념에 관한 얘기로 늘 바빴다.
언니는 본인의 관심사를 매번 명리와 연결지었다. 큰 조카가 첫 수능시험을 망친 원인을 명리에서 찾았고, 이는 어울리지 않는 옷 색상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수능시험에서는 철저하게 속옷부터 시작해서 모든 물건의 색을 조카의 사주에 맞는 남색으로 준비했다. 이런 언니의 신념은 조카가 재수생과 재학생 전원 중에서 1등이라는 수능 결과를 내면서 맹신으로 바뀌었다.
가톨릭 신자인 친구는 언니의 명리 얘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친구는 언니에게 명리 얘기를 하지 말아 달라 요구했다. 하지만 한 주장 하는 언니의 답변은 이랬다.
“니 종교는 가톨릭이고 내 종교는 명리다. 내가 니 종교를 존중하듯, 니도 내 종교를 존중해줘야지”
이런 언니의 종교적 믿음에 내가 반박했다. ‘명리 위에 성격’이라고.
우리 둘을 소개할 때마다 늘 하는 얘기다. “엄마 아부지가 같구요, 주민등록번호 앞자리 6개가 같은 사이입니다” 그러면 아! 하고 바로 알아듣는 사람들과 무슨 얘기지 하며 눈을 쳐다보는 사람들로 나뉜다. 그럼 다시 “열 달 동안 엄마 뱃속에서 동고동락한 사이입니다” 그제 서야 아! 하고 웃으며 먼저 알아듣지 못한 것을 멋쩍어한다.
어릴 적 자라온 환경이 가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럼 우리 둘이 자란 환경을 한번 살펴볼까? 같은 엄마 뱃속에서 같은 부모 형제와 같은 집에서 같은 것을 먹고 같은 친구들과 같은 놀이를 하다가 같은 이불을 덮고 같은 시간에 잠 들었다. 그리고 같은 학교, 같은 학년, 같은 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선생님께 같은 과목을 공부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뭐 좀 ‘같은 환경’이라 명함을 내밀 수 있지 않을까? 이러다 보니 우리 둘은 외모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닮은 면이 참 많다.
시골인 우리 동네에 명리를 보는 집이 생기고부터 엄마는 해가 바뀌면 늘 신수를 보셨다. 그때마다 엄마에게 “뭐라 하던데?” 하며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여쭤보면 “너거는 올해도 다 좋다 하더라” 하셨다. 태어난 년·월·일·시가 같기에 우리 둘을 묶어 ‘너거는’ 하는 것에 우리 둘은 의문을 제시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 둘은 사주를 한 사람만 본다. 둘이 볼 필요가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신기하게도 우리 둘의 삶은 닮았었다.
우리는 같은 날 결혼해서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서 살았다. 그리고 우리는 웨딩숍을, 남편들은 풋살축구장을 함께 경영했다. 아침이 되면 우리는 웨딩숍과 풋살장으로 출근했고, 아이들은 사이좋게 같은 학교로 등교했다. 그리고 우리 두 집 살림을 한 사람이 맡아 했다. 우리 둘은 잠만 다른 층에서 잘 뿐 여전히 먹고, 자고, 일하는 것은 같았다. 이러다 보니 이때 까지만 해도 우리 주변의 모두가 ‘사주가 같으면 비슷한 삶을 사는구나!’를 정설로 받아들였다.
한때 ‘바이오리듬’이 유행했다. 보험회사에 다니는 아는 지인이 매달 바이오리듬을 뽑아주었는데, 우리 둘에게는 한 장만 뽑아주었다. 이 프로그램은 태어난 년·월·일·시를 이용해서 한 달의 에너지 흐름을 알려주기에 우리에겐 두 장의 바이오리듬 결과가 필요 없었다. 신기하게도 바이오리듬에 나타난 우리 둘의 컨디션은 실제로도 비슷했다. 한 참 시간이 흘러, 나이 들어 떨어진 체력으로 논문을 쓰려니 눈 초점이 흐릴 때가 많았다.
“논문을 너무 열심히 써서 그런가 운전하는데 표지판이 잘 안 보이네. 오늘따라 더 심하다.”
“니도 그렇나? 나도 오늘따라 눈이 영 침침한 게 초점이 잘 안 맞네. 난 논문도 안 쓰는데···”
매년 봄이면 나는 비염으로 고생한다. 가끔 비염이 너무 심해 혹시나 해서 언니에게 물어보면 언니 역시 같았다.
우리 둘은 모든 것이 비슷한데 신기하게도 성격은 다르다. 살아온 환경이 같기에 여러 면에서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우리 두 사람이지만, 신기하게도 어떤 것을 선택할 땐 늘 다르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시점은 늘 같지만, 그것을 결정 내릴 때는 각자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선택했다. 대학도, 학과도, 직장도, 취미 활동도 그리고 물건들까지도 같은 시기지만 늘 달랐다. 같이 웨딩숍을 운영하였어도 언니는 메이컵을 했고 나는 촬영을 했다.
성격은 배우자 선택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 둘은 같은 날 결혼했지만, 신랑들의 성향은 굉장히 달랐다. 같은 아부지를 바라보고 자랐지만, 나는 잘 생긴 외모와 강한 아집의 아부지를 바라보았고, 언니는 대단한 웅변가와 애처가인 아부지 모습을 바라보았나 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성향의 남편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프로이드는 어린 아이들이 자라면서 동성인 부모에게는 적대적이고 이성인 부모에게는 호의적인 복합감정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이를 남자아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여자아이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라 했다.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신화에서 아가멤논의 딸 엘렉트라가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에게 복수한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는데, 여자아이가 아버지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경쟁의식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이를 볼 때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이토록 다른 성향의 신랑을 선택한 데는 아마도 아부지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지 않을까?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지만, 성격에 따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거든.
아부지는 평생을 시골에서 농사만 지으셨다. 하지만 누가 봐도 고위 공직자로 정년 퇴임하고 시골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으로 보일 만큼 부유하고 지적인 외모를 가지셨다. 균형 있는 깔끔한 몸매, 고집스러운 눈매와 꽉 다문 입술, 넓은 이마와 윤기 나고 숱 많은 머릿결, 시원하게 높고 곧은 콧대는 살아온 환경과는 사뭇 다른 이미지다. 그리고 대단한 웅변가셨다. 일하시다 말고 주변 사람들과 대화가 시작되면 일은 뒷전이셨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불만이셨다.
“너거 아부지 만큼 웅변가는 드물끼다. 맨날 일은 뒷전이고 저래 웅변에만 관심이다.”
그리고 아부지는 굉장한 아집의 소유자셨고 대단한 자린고비셨다. 물고기가 퉁발에 한번 들어가면 못 나오는 것처럼 아부지한텐 돈이 그랬다. 한 번 통장에 들어간 돈은 꺼내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 집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알부자였다. 우리 동네에서 농협 빚 없는 집은 우리 집뿐이었다. 농촌에서의 수입이란 가을 추수 때 한 번뿐인데, 그런 농촌에서 농협 빚 없이 산다는 것이 살림 사는 엄마에게 얼마나 혹독한 환경이었겠는가? 엄마의 힘든 삶은 아부지에겐 관심사가 아니었고 엄마의 불만은 아부지에겐 통하지 않았다. 엄마는 늘 우리 딸들한테 말씀하셨다.
“너거 아부지 죽고 나서 꿈에서도 보고싶은 적 없다. 우째 그리도 당신 생각만 옳다고 우기는지 언기증 난다”
이런 엄마 생각과는 다르게 아부지는 대단한 애처가셨다. 엄마가 아부지한테 불만을 토로하면 아부지는 늘 이 말씀으로 엄마의 입을 다물게 하셨다.
“내가 평생을 너거 엄마 말고는 다른 여자 손목 한 번 잡아본 적 없고 눈길 한 번 준 적 없데이”
우리 딸들은 엄마에게 농담하곤 한다.
"혹시 이 또한 돈이 걱정되어 그런 것은 아닐까?"
이런 아부지에게 우리 둘은 서로 다른 모습을 바라보았나 보다.
사주가 같기에 늘 같은 삶을 살 것 같았던 우리였지만, 지금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근 20년을 함께 하였으나 언니가 가정주부를 선택하면서 우리 둘의 ‘같은 환경’은 작별했다. 우리 가족은 언니와 함께하였던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이사했고 언니는 웨딩숍을 그만뒀지만, 나는 계속해서 운영했다. 아이들도 각자 다른 학교로 진학했으며, 남편들 역시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이러한 얘기를 언니에게 쭉 하고는
“니하고 내가 지금 다른 삶을 사는 건 명리가 아니라 성격 탓 맞제?” 하고 물어보니
“그카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하며 큰 반박이 없다. 언니가 이렇게 반박하지 않는다는 것은 수긍한다는 것이다.
성격이 명리를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