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를 알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도구로 성격유형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가끔 성격유형의 틀 안에 갇혀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성격유형을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 사람은 T니까 그런 거야. T들은 다들 그래, 어쩔 수 없어”
“나는 감정형이라 그래. 너희가 이해해”
“B형 남자는 다 그래. 그러니까 B형은 안 돼”
이런 방식으로 성격유형을 사용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이는 성격유형을 모르니만 못하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꼴이 된다.
나를 알고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성격은 참 좋은 도구다. 상대와 소통이 원활해지면서 더 나은 대인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편견을 가지거나, 사람들을 일괄적으로 묶어 단정하거나, 타인을 비난하고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성격유형을 사용한다면 위험하다.
모든 것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요리할 때 칼은 참으로 좋은 도구지만, 잘못 다루게 되면 큰 사고로 이어진다. 성격유형 또한 이러하다. 칼자루를 잡으면 칼은 유용한 도구가 되지만, 칼날을 잡으면 나를 베이게 하는 흉기가 된다. 칼자루와 칼날 중 어디를 잡는가는 각자 개인에게 달려있다.
냄비에 된장을 끓이고 있다. 99도 일 때까지는 조용하다. 그러다가 100도가 되면서 끓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면 부글부글 끓는다. 이때 잽싸게 뚜껑을 열어야 한다. 만약 이 짧은 시간을 놓쳐버리면 냄비는 끓어 넘치게 된다. 그리고 냄비도 싱크대도 엉망이 되어 버린다. 그 짧은 시간을 놓치면 뒷일은 아주 힘들어진다. 누구나 경험했기에 얼마나 힘든지 잘 알 것이다.
성격으로 나를 알고 타인을 이해했다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비록 화는 나지만 끓어 넘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내가 성격을 공부하면서 얻은 최고의 선물이다. 내가 칼자루를 잡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나는 남편과 언니와 가끔 크게 싸운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 잘 싸우는 법이거든. 옆집 아저씨나 아줌마랑 크게 싸울 일이 별로 없지 않은가?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을 땐,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곤 했다. 그러니까 냄비가 끓어 넘친 것이었다. 하지만 남편과 언니의 성격을 이해하고부터는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 여기서 좋아졌다는 것은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끓어 넘치기 전에 뚜껑을 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성격을 공부하면서 남편과 언니의 성격을 이해하게 되었고, 성격에 따라 끓어 넘치는 지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떨 때 그들이 끓어 넘치는지를 알게 되었다. 어쩌다 싸울 때, 나는 그 지점이 왔다고 느껴질 땐 말을 아낀다. 왜냐면 감정이 끓어 오를 땐 공자, 예수, 부처님의 훌륭한 말씀도 곱게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성현의 말씀도 삐뚤게 들리는 마당에, 하물며 나의 감정이 묻어난 말은 말해 뭣할까? 이 단순한 걸 몰라서 그렇게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