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재시작

번역에 대하여 #2.

by 겨울색하늘

완연한 겨울. 점점 옷이 두꺼워지고 무거워지는 계절이 되어, 결국 그것이 한 해 동안 쌓아왔던 무언가의 무게라고 여기며 연말을 버티고 있는 요즘. 물론 그게 한 해의 성과가 좋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출근길에 마주한 겨울의 새벽 공기는 한기를 잔뜩 머금은 채 코트 속을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부르르 떨리는 입술에서는 자연스럽게 새하얀 김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가을에는 단풍 구경을 거의 못했는데. 동네 길가에 있는 나무 몇몇은 붉게 물든 잎사귀를 보여주긴 했지만, 가을이라는 계절을 느끼기도 전에 금방 낙엽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 올해의 마지막을 견뎌내고 있었다.

신문으로 이번 노벨 문학상 소식을 들었을 때 외국인들이 이 감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놀랍다고 생각했다. 그건 예전 맨부커상 수상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같은 이유에서였다.
문학이라는 건 감성적인 영역이 큰 분야이고, 노벨상이라는 건 올림픽이나 올림피아드처럼 점수로 경쟁하는 분야가 아니니까. 그리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 의해 평가받아야 하기 때문에 번역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 없이 중요한 것이었을텐데, 이번에도 그러한 진입장벽을 돌파해낸 것이었다.
물론 이번의 수상의 가장 큰 공로가 언어와 문화를 초월한 번역 덕분이라고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훌륭한 번역으로 인해 작품이 어디까지 빛날 수 있는지, 그 중요성을 보여준 좋은 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런 훌륭한 번역이라는 건 무엇에 기인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해박한 언어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적절한 단어나 문장 선택, 혹은 문화권에 대한 깊은 이해 등 그럴듯한 이유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본질은 역시 '순간의 표현'이 아닐까.
결국 번역이라는 건 의미의 전달을 넘어 순간의 전달이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해한 그 순간을 작은 심상 속 상자에 조심스럽게 담아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그 상자를 열어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 요컨대 블루를 단순히 파랑이 아니라 우울함, 울적함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순간을 담는 심상 속 상자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건 번역을 하는 사람이 어떤 번역을 하고싶은지에 따라 다르게 준비되는, 플레이팅을 위한 접시같은 이미지다. 최대한 원문을 파악한 그대로 전달하기 위한 번역은 음식에 외에 다른 요소를 개입하지 않게 만드는 순백의 민무늬 접시. 원문의 느낌을 보다 잘 살리기 위해 번역하는 본인의 느낌까지 생동감있게 담아내는 번역은 화려한 무늬 장식이 있는 접시. 원문의 분위기와 번역가의 스타일에 따라 다르게 준비될 수 있는 이 접시는 어쩌면 번역이라는 작업의 결과물을 사람에 따라 완전하게 다르게 이해하도록 만들수도 있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글보다 사진이나 그림이 번역의 본질적인 의미와 더 가까울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주 가끔은ㅡ, 이런 것들을 번역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기들의 비언어적 표현들. 아기의 언어라는 게 실존하는지는 차치하고,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하는 아기들은 알 수 없는 소리와 표정, 그리고 제스처를 통해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려고 애쓴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표현들이 아기들만의 언어라고 여기고 있다. 그게 사회에 통용되는 성숙한 언어의 형태로 다듬어지지 않았을 뿐, 단순히 의미없는 소리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도 명확한 니즈가 내포되어 있다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지 않았던가.

이제 태어난지 한 해가 채 지나지 않은 아기도 달콤한 망고나 멜론을 달라는 표현을 한다. 사회적으로 약속된 멜론과 망고라는 발음은 아니지만 마치 뭐라고 부르기로 정한 것 같은, 알수 없는 어떤 발음을 반복해서 외친다. 그리고 더욱 신기한 건 베테랑 부모들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 바로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물론 그와 동시에 아기들이 팔을 휘젓는 어떤 제스쳐 때문에 그런 것일수도 있지만.

돌이 갓 지난 아기를 키우고 있는 시점이기에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 아기의 옹알이를 알아듣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아마 아기를 키우는 모든 부모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물론 시간이 지나 언어를 학습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게 되겠지만, 그 시절에만 하고 싶은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있는 거니까. 번역을 순간의 전달이라고 한다면, 이 시점에만 번역을 통해 들을 수 있는 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아기어 번역기라는 게 실제로 출시된다면 육아 필수템 등극은 물론 분명히 전세계적으로 대박을 칠 수 있는 그런 아이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눈 앞에서 여전히 그림책의 뭔가를 정확히 가리키며 소리를 내는 아기를 보며 아기어 번역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창 밖으로 어느 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불곡산이 정면으로 보이는 창 밖으로 금새 많은 것들이 색깔을 잃고 새하얗게 덮여가고 있었다.
아기도 금새 시선을 돌려 창 밖을 응시하다가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올해 첫 눈인데, 아깝다며 밖으로 나가자고 하는 것 같아, 귀여운 토끼가 그려진 두꺼운 니트에 알록달록한 패딩까지 주섬주섬 챙겨입혀서 아기와 함께 집 밖으로 나왔다.

내리는 눈 사이로 짙게 깔린 적막감을 즐기며 눈 내리는 놀이터 풍경이 잘 보이는 카페에 들어왔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서 내려다보니 아기는 어느새 품 속에서 잠들어있었다. 창가쪽에 빈 자리를 잡고 맞은편 소파에 아기를 살짝 눕히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켜놓고 이미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놀이터의 아이들에게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켜진 채 덩그러니 놓여있는 휴대용 게임기들도.

동일한 관점에서 무생물을 바라보면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기계. 기계 역시 기계어를 이해하고 출력한다. 일방적인 소통이긴 해도 기계어는 엄연히 언어로써 기능하고 있다. 그런 기계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혹은 그 반대의 작업도 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순간의 전달이라면 기계 역시 특정 시간의 로그의 형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여줄수 있다. 단지 감정이 배제된 현상만을 출력했기에 기계어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건 아니지만, 애초에 기계어라는 분야는 일반적인 언어와 다르게 매우 논리적이라 보편적인 접근이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장벽을 낮춰줄 수 있는 기계가, 기계어 번역기로써 있다면 어떨까?
예를 들면 '13시00분에 180초간 Error101 발생' 이라는 로그가 있다면 이걸 '한 시쯤 인터넷 연결이 3분간 끊겼었는데 안테나 접촉불량인 것 같아!' 정도로 번역해줄 수 있다면 기계가 조금은 친숙해질 수 있을까.

사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아기어 번역기까지는 몰라도 기계어 번역기는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에러코드와 추정 원인은 모두 개발 데이터베이스에 있고, 번역할 수 있는 개발자들 역시 있으니 지금이라도 마음먹으면 가능한 게 아닌지.(아니면 굳이 할 필요가 없어서 안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놀이터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게임기는 차가운 눈을 맞으면서 무슨 에러 메세지를 출력하고 있을까. 아이들도 의식했는지 게임기 위에 눈을 털어내고 가방 속에 넣어두고는 다시금 눈덩이를 정신없이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상념들이 지나간 어느 겨울날의 한 순간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실 내게 필요한 건 내 마음 번역기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함박눈이 내리는 어느 겨울의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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