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막의 연금술사 Feb 25. 2022

이코노미 이야기

우리 회사의 비행기 좌석은 기종과 목적지에 따라서 이코노미/비즈니스/퍼스트로 나누어지는데,

승무원으로 입사 시 무조건 이코노미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고, 경력직으로 들어온다 하더라도, 일정 기간 이상은 이코노미에서 일을 해야 진급이 가능하다.


나는 우리 회사 지상직으로 4년을 일했지만, 그것이 승무원의 경력은 아니므로, 소위 말하는 ‘패스트 트랙(경력직 사원에게 진급의 기회를 우선적으로 주는 것)을 받지 못했고, 그렇게 이코노미에서의 긴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회사 내 직급체계는 F2(이코노미 객실 승무원), F1(비즈니스/퍼스트 객실 승무원), CS(이코노미 객실 총괄담당), CSD(비즈니스, 퍼스트 객실 및 비행기 전체 담당)로 나누어져 있는데, 한 등급에서 일정 기간 이상 일을 하게 되면 크게 문제가 있지 않는 한, 자동 진급이 이루어지는 시스템이다.


내가 입사하던 2018년 즈음에는 대개 2년 정도, 늦어도 3년 안으로는 비즈니스 크루로 진급이 이루어졌고, 나는 비행 2년 차가 되는 2020년 초, 나의 승진을 바라며 열심히 비행을 했다. 진급의 순번이 우리 배치에 가까워질수록 그렇게 나의 기대는 점점 높아져갔다.


그리고 대망의 2020년.

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2020년의 시작과 함께 코로나가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기 시작했고, 비행기에서 슬슬 마스크를 쓰는 손님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게 메르스나 사스처럼 잠깐 지나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가끔 4-5일 정도의 긴 오프가 나오면 한국에 가서 가족들도 보고 한국 음식과 물건을 가져오고는 했기에, 2월 말, 4일의 오프를 받은 나는 평소처럼 잠깐 한국 집에 다녀올 계획을 세웠다.


간단히 짐을 싸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선 나는 그렇게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는 몰랐다. 나의 3박 4일 한국행이 무려 1년 3개월의 여정이 될 줄은...


내가 한국에 도착한 날부터, 카타르에서는 한국발 승객에 대해 카타르 입국을 제한하기 시작했고, 나의 로스터는 매달 휴가로 변경되어 그렇게 나는 1년 3개월을 한국에 머무르게 되었다.


2014년에 한국을 떠나, 한국에서는 제대로 지내본 적이 없었기에,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하는 것이 좋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곳에 있는 기분이었고, 가족들과 함께 있어 기쁘면서도 뭔가 잃어버린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사이 회사는 구조조정을 시작했고, 각 등급들에서 신입에 속하는 사람들은 구조조정을 당했다.

내가 진급을 해야 할 시기에 코로나가 터진 상황이라, 나는 이코노미에서 매우 시니어에 속하는 편이었고 그 덕에 구조조정을 비껴갔지만, 대신 친구들 몇 명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1년 3개월이 지나 코로나가 잠시 잠잠해질 즈음 회사로 돌아오게 된 나는 지옥의 비행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유인즉슨, 인원 감축으로 인해 승무원의 숫자는 줄었는데, 손님의 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승무원의 할 일 목록은 정말 많지만 간단히 음식서비스에 관해서만 말해보자면, 이코노미의 경우, 카트로 식사 서비스를 진행하는데 한 카트에 40개의 음식 트레이와 빵, 메인 음식이 들어간다. 원래는 승무원 명이 카트를 담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실 40개의 트레이를 서빙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3가지 정도 되는 메뉴와 많은 종류의 음료를 전부 말로 설명해야 하고, 거의 항상 부족한 메뉴가 있기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야 서비스를 끝낼 수 있다. 밤 비행인 경우, 주무시는 손님들을 깨우는 것도 일이고, 아이나 아기와 여행하시는 손님이 계시면,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많아져서 서비스가 더 오래 걸린다.)


코로나로 인해 인원 감축 후 이어진 몇 달간의 비행에서는 승무원 당 카트를 2개씩 끌어야 하는 상황도 자주 발생했다. 이 경우, 육체적으로 피로한 건 둘째 치고, 두 번째 카트에서 음식을 받는 손님들의 컴플레인이 정말 심했다. (배고픈데 음식 서비스가 늦어지는 것에 대해 화를 내시는 부분은 이해하지만, 정말 우리도 어쩔 수 없다... ㅠㅠ 서비스 시작부터 손님들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정말 비행 내내 살얼음이다. 게다가 서비스 딜레이로 인해 컴플레인을 받은 상황에서 컴플레인을 한 손님이 원하시는 메뉴를 못 받는 상황까지 발생하면 정말... 울고 싶다.)


이 외에도 나는 시니어 사번이었기에, 부엌을 정말 자주 맡았다. 부엌을 담당하는 승무원을 갤리 매니저라고 하는데, 비행 전 브리핑에서 각자의 담당 존과 갤리 매니저를 정한다. 보통의 경우, 갤리를 맡으면 본인은 담당 카트가 없다. 대신 서비스에 필요한 음식과 음료, 카트들을 차질 없이 준비하고, 다른 크루들이 서비스를 할 때 서비스가 문제없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서포트를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승무원 감축으로 인하여, 갤리 매니저가 카트를 끄는 일은 거의 일상이 되었고, 최악의 경우, 본인 카트를 포함한 6개의 카트를 만들고, 다른 크루들과 함께 서비스를 나가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게다가 특별식을 신청한 손님들이 많은 날에는 정말 대환장 파티가 벌어진다. 특별식 개수를 정확히 세야 하고, 서비스 존에 따라 각 카트에 필요한 특별식을 카트 별로 정확히 나눠 실어야 한다. 이게 결코 쉽지 않은 역할이라서, 주로 시니어들에게 돌아오는데, 한국인 시니어인 나는 아주 매우 진짜 정말 자주 이 역할을 맡았다.


여기서 퀴즈. 승무원들 내에서 갤리 매니저 시키면 부엌살림 잘하기로 유명한 국적들 중 하나는? 정답은 역시! 한국이다. 한국인들이 또  이 부엌살림을 기가 막히게 해낸다. 나도 이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정말 엄청 열심히 했다.


언젠가는 허리가 너무 아파서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더니, 한 달 동안 한번 빼고 모든 비행에서 갤리 매니저를 했더라...(갤리를 맡으면, 차와 커피 주전자, 주스 팩(서랍당 무게가 최소 8kg는 나간다), 음식, 컨테이너 및 탄산음료 (서랍당 20캔이 들어있다) 같은 것을 수도 없이 옮겨야 한다.)

어느 날은 허리가 삐끗해서 (6일 연속으로 비행을 했던 주였다. 거의 다 만석 비행에, 비행마다 갤리를 맡아서 허리가 약해져 있었다.) 진통제를 먹고 비행을 간 적도 있었다. (편도로 1시간밖에 안 되는 비행이라서 병가 내기도 그랬다.)


아무튼 이 외에도 차마 말 못 할 수많은 일이 있었던 이코노미 생활이었다.




회사가 생각보다 빨리 정상화되어서, 몇 달 전부터 신입사원들이 엄청 들어오기 시작했고, 한 달 전부터 이제 곧 진급이 시작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그러나 여전히 내 진급 소식은 없었고, 나는 지옥의 이코노미 쳇바퀴에 갇혀 무한 반복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다, 휴가 후 서비스 평가가 있었던 미국 비행을 끝내고 호텔에 도착했는데, 회사에서 메시지가 왔다. “로스터 변경, 확인 요망”. 다음 주 내내 스탠바이라서, 또 어디 미국에 나를 보내려고 하나... 한숨을 쉬며 로스터를 확인한 순간, 내 눈에 들어온 알림 메시지.


“F1 진급 트레이닝.”


진급이었다. 한 주의 스탠바이가 모두 날아가고 3월 초까지의 트레이닝 날짜가 내 로스터에 들어와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너무 기쁘고 그동안 힘들었던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눈물이 났다.

특히나 그날 미국 비행이 너무 힘들어서 더 눈물이 났다. 로스터에 뜬 F1이라는 단어를 본 순간, 나는 내 핸드폰을 붙잡고 한동안 엉엉 울었다. 비행을 막 끝낸 후라, 화장도 안 지웠고, 올림머리도 그대로인데. 그냥 그대로 호텔 방구석 소파에서 두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나중에 화장 지울 때 보니 내 얼굴이 아주 볼만했다는 건 안 비밀이다.)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비행이 피곤해서였을까. 나는 그렇게 그날 미국에서 시차를 하나도 느끼지 못한 채 12시간 넘게 푹 자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이 마지막 이코노미라서 기쁠 줄 알았는데, 그런 생각 할 겨를도 없이 엄청 엄청 바빴다는 것도 안 비밀이다. 중간에 난기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난기류 덕에 무려, 미국 비행에서 잠시나마 자리에 앉는 호사를 누렸다. 기내가 많이 흔들렸지만, 나는 행복했다ㅠ) 나는 미국에서 카타르까지 걸어올 뻔했다.


아무튼 나의 약 4년간의 이코노미 생활은 이렇게 마무리되었고, 이 글이 올라온 현재는 비즈니스/퍼스트 클래스 트레이닝 중이다.


배워야 할 것도, 외워야 할 것도 많은 데다, 연속으로 몰아치는 트레이닝으로 몸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지만, 기쁜 마음으로 교육을 받고 있다.

 

열심히 할 거고, 반드시 잘 해낼 거다.

아자아자! 힘 내보자!!


이제 공부하러 가야지...

오늘도 이렇게 사막에서의 바쁜 하루가 지나간다.



*이전 이야기* https://brunch.co.kr/@a7lchemist/11

*다음 이야기* https://brunch.co.kr/@a7lchemist/13


작가의 이전글 운수 좋은 휴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