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텨라 버텨. 귀가 트일 때까지.
그렇게 한 달의 본사 교육을 마치고, 우리는 공항에서 실습을 하게 되었다.
본사에서 교육받은 한 달의 내용을 토대로, 실제로 공항의 흐름을 파악하는 또 다른 한 달 과정의 트레이닝인데, 이때에는 공항 OJT(On the Job Training) 팀이 교육을 진행한다.
이들은 Joining Champion이라 불리는 실무교육 팀으로 현장 경험이 있는 시니어들로 구성, 신입사원들에게 약 한 달간 실무교육을 진행하고 그를 바탕으로 신입사원 평가를 하는 팀이다.
미리 스포를 하자면, 입사 초반, 잔뜩 겁을 먹은 채 공항에서 실무교육을 받던 나는, 약 20개월 뒤, OJT 팀으로 들어가 2년간 신입사원 교육을 진행하게 된다.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고 하더니. 딱 그렇다.
아무튼 그렇게 실무교육은 시작되었고, 새로운 공부 거리와 함께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공항에서 근무를 시작하자, 또 다른 새로운 버전의 영어들이 등장한 것이다.
영국, 유럽, 인도,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네팔, 필리핀, 모로코, 튀니지, 이집트, 태국, 인도네시아, 요르단, 남아공, 케냐, 우간다 등등등 온갖 국적의 직원들이 하는 영어의 악센트는 전부 달랐고, 전 세계에서 온 손님들의 국적은 더욱 다양해서 알아듣기까지 꽤나 고생했다.
(지금은 우리 항공사에서 몇 년 일한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이, 누군가가 말하는 영어를 몇 문장만 들으면 국적을 유추할 수 있다.)
실무실습을 하며 수습 기간인 6개월이 끝날 때까지는 아침에는 일하고 퇴근하고 나서는 영어 공부를 하면서 지냈다. 기본 영어회화 책으로 공부를 하면서 모르는 것은 언니들에게 물어보고, 동기 중에 유일한 동생인 S 양(S 양과는 아직도 연락하며 지내는데, 지상직 시절부터 나에게 정말 큰 힘이 되어 주는 존재이다.)과 함께 공부를 했다.
물론 그 사이사이에 공항에서 고생한 건 말할 것도 없다. 손님 말 못 알아듣고 시니어 부른 건 여러 번, 손님 응대하면서 버벅 거린 경우는 셀 수도 없다. 하필 말도 많이 해야 하고, 손님마다 비자 건으로 인해 시스템으로 영어문서를 엄청나게 봐야 하는 체크인 카운터에 배정되어서, (카운터로 배정이 되던 날ㅠ 진짜 울고 싶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카운터 일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정말 고생 좀 했다.
직원들의 대화를 듣다가 이해하지 못한 단어가 있으면 몰래 쪽지에 적었다가 집에 가서 사전으로 찾아 암기했고, 당장 일에 필요한데 모르는 단어들이 나오면,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몰래 핸드폰으로 검색해서 종이에 뜻과 발음을 적어놓았다. 내 발음 중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 단어가 있으면 집에 가서 정확한 발음을 찾아서 몇 번씩이고 다시 연습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시니어를 불러야 하니, 미안한 마음에 평소에는 더 열심히 일했고, 영어로 말하는 게 아직은 서툴 때라서, 카운터에서는 사적으로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격이 원체 낯을 좀 많이 가린다;;;)
그렇게 몇 달 일했더니, 동료들과 시니어들은 외려 나를 조용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좋은 직원으로 평가하기 시작했고, 손님을 많이 받은 덕에, 일 실력도, 영어 실력도 나날이 늘게 되었다.
그렇게 수습 기간 6개월이 끝나고, 오랜만에 한국으로 가는 날. 비행기 안에서 볼만한 영화를 찾다가, 공부도 할 겸 영어로 애니메이션을 틀었는데…
주인공이 하는 말이, 한글 자막 없이도 들리기 시작했다. 번역하면서 들어야지 해서 들리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문장이 쏙쏙 머릿속으로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아. 내 영어가 늘었구나.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확실히 느꼈다.
그 후, 나는 영어회화 책,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 더욱 영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2년여 뒤에는 OJT 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나에게 또 다른 좋은 기회가 되었는데, 부서의 특성상, 신입사원들의 교육 및 평가를 비롯하여, 여러 부서들과 소통을 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아서, 다양한 분야의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2여 년간 신입사원 교육과 오피스 업무, 공항 업무를 병행하며 근무를 했다.
입사 초반에는 고생은 좀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귀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절대 이 속도로 영어실력을 키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의 영어교육이 불가하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는 영어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잘 지낼 수 있기에, 내 스스로가 느끼는 절박함이 덜 하다는 의미이다. 나는 무언가 닥치거나 절박함에 사로잡혀야 내가 가진 최대치의 능력을 발휘하는 타입이다.)
나의 영어 공부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영어는 나의 모국어가 아니기에 완벽할 수 없고- (그렇다고 나의 한국어 실력이 완벽 한건 아니지만) 여전히 영어 대화 시 종종의 오류를 범하며, 전반적으로 공부가 더 필요하지만, (내가 말할 때 문법/단어/발음을 틀리면 나의 남아공 친구 M 양의 지적이 바로 날아들어오는데, 이건 내가 그녀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녀의 영어실력은 원어민 수준이라서 나의 영어 공부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우리는 OJT 때 만났는데, 후로 너무 친해져서 지금은 자매처럼 지내며 한 달에 2-3번은 만난다.) 그래도 영어로 일하고, 영어로 생활하는데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으며, 세계 어디에 떨어뜨려놓아도 혼자서 잘 먹고 잘 다닌다.
하지만 이제 나의 영어 에스컬레이터는 운행을 멈추었고, 영어 계단의 시기가 찾아왔으므로, 최근에는 다시 마음을 다 잡고자, 영어 강의 패키지를 결제했다.
입사 초반의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열심히 공부해 보려 한다.
아자아자!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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