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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아 Jul 04. 2023

저버리지 않는, 나에 대한 믿음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운명을 믿는 편이다. 일상에서 신기한 일이 벌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단어. 운명.     


 삼 일 전, 이미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듯한 일이 있었다. 한동안 꿈을 꾸지 않다가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아주 짧은 꿈이었지만, 또렷이 기억난다. 친언니와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언니가 말했다.     


 "네 치아가 왜 이렇게 새카매?"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치아를 보러 거울 앞으로 뛰어갔다. 언니 말대로 치아 하나가 까맣게 변해있었다. 이가 썩은 듯했다. 치과에 가서 이를 뽑아야겠다고 혼잣말을 하다가 깨어났다. 그제야 꿈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기분이 참 이상했다.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 기분은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이럴 땐 몸과 마음을 아끼는 게 좋다. 잘 못 했다간 가족과의 말다툼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니까. 몸과 마음을 아낀 덕분에 하루를 잘 보냈다. 그날 밤에 장마철이라 그런지 비가 하염없이 퍼붓고 번개까지 쳤다. 밤잠을 설쳐 조금은 부은 얼굴로 주방으로 갔다. 아침을 차리려고 필요한 식기류를 꺼내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바닥만 한 원형 접시가 깨져있는 것이었다.


 간밤에 번개가 친 영향일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럼, 비가 쉬지 않고 내려서 습도가 급격하게 올라간 탓일까?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다가 서둘러 아침을 차렸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잔소리가 많았다. 학교와 회사로 가는 아이들과 남편에게 평소보다 더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집안을 정리했다.


 한숨 돌리려고 소파에 앉았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 특별한 일이 있지 않으면 전화는 잘하지 않는 사람인데...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상기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퇴원하실 때까지 기다리셨나... 조금 전에 아버지 퇴원하셨어.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요양원에서 연락이 왔어."     


 작년에도 요양원에서 말하길 시할머니께서 오늘내일하신다고 했었다. 그래도 잘 지내주셨는데. 이제는 정말 할머님을 보내드려야 할 때가 왔다. 기분이 별로인 꿈을 꾼 것도, 성하던 접시가 소리 없이 깨져있던 것도, 마음을 정돈하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곁을 떠나면 나도 모르게 주위를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과거는 놓아주고 미래에 연연하지 말자고 스스로 말한다. 현재를 살아가자고 다짐한다.      


 현재를 살아감에 있어서 중요한 건. 나를 둘러싼 삶이다. 그 삶에는 사람과 일이 주이다. 그러니까 인간관계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인 것이다. 이 두 가지에는 공통점이 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이렇듯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는, 어쩌면 운명적인 무언의 힘이 작용하는 듯도 하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도 같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잡을 수 없는 무언가의 힘이 작용하는 듯한 기분.


 그래서 가끔은 인간관계와 일에 대한 회의도 든다. 그렇다고 애를 쓰지 않을 수는 없다. 운명이란 이미 정해져 있지만, 어떻게 어떠한 식으로 흘러갈지 모르기에 오늘도 애를 쓴다. 이 혼란스러움 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의 마음이다. 운명이 있어서 언젠가는 곁에서 멀어질 사람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지금의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살아간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훗날 돌아봤을 때 후회가 남지 않도록. 이러한 마음이야말로 진정으로 나를 그리고 삶을 위한 일이라고 믿는다. 인간관계든 무언갈 향한 삶이든 다들 늦었다고 해도 늦지 않았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 이것은 나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시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의 말씀은 “고마웠다. 너희들 덕분에 잘 살았다.”,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사람과 삶에 대한 믿음을 갖고 한평생 잘 살다 가신 것 같다. 나도 그러한 믿음을 갖고 살다 가고 싶다. 나의 마지막에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다. 나에게 머물러 있던 욕망 중 많은 게 사라지고 없다. 이 마음만큼은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싶은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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