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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아 Aug 14. 2023

아무런 조건과 목적 없이, 나는 스스로 작가가 된다

에세이와 재능

 

 에세이(essay)는 외래어로 수필과 같은 뜻을 지닌 문학 장르 중 하나이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요즘엔 수필이라는 단어보다 에세이를 주로 사용한다. 외래어이냐 아니냐의 차이만 있을 뿐 수필가나 에세이스트는 같은 의미를 지닌다. 수필은 글의 무게와 농도에 따라 경수필과 중수필로 나뉜다. 에세이도 개념에세이와 일상에세이가 있다. 일상에세이는 수필로 따지면 경수필에 해당하고, 글쓴이의 사사로운 삶과 감정에 깊이 닿아 있어서 생활에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념에세이는 중수필에 해당한다. 여기에도 글쓴이의 이야기와 사유가 들어가지만, 사회가 반영된 사회정치, 사회과학, 사회비평 등의 비중이 크다.

 

 브런치스토리 홈에는 여러 개의 카테고리가 있는데, ‘감성 에세이’에 올라오는 글들이 일상에세이(혹은 경수필)에 해당한다. 내가 2019년도부터 현재까지 써온 천 편이 넘는 에세이의 90% 이상이 일상에세이다. 에세이는 산문 계열에 해당하며 산문 계열 글에는 대표적으로 소설과 에세이가 있다.

 

 열 권 이상의 에세이집을 출간한 어느 에세이스트가 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 “저는 에세이스트 000입니다.”, 하고 말했다. 본인을 소개할 때 작가라는 호칭을 쓰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에세이스트라고 하는 그의 인사말이 인상적이었다. 당시에는 에세이스트라는 단어가 생소해서 더욱 기억에 남았다. 그의 첫 책이 2010년 이전에 세상으로 나왔으니 에세이를 쓴 지 10년이 넘었다. 나는 가끔 소설과 시도 쓰지만, 그는 에세이만 써온 듯했다. 그가 출간한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이 있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그 문장들이 선명하다.


 당시의 나는 독후감만 썼던 사람이었다. 이제 막 독후감에 내 이야기를 덧대어 쓰고 싶은 마음이 일던 상태였다. 내 이야기를 쓰고 싶은 욕구는 올라오는데 쓸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일기도 힘겨워했기에 그가 참 대단해 보였다. 그런데 그의 책 어느 곳에는 “일기는 일기장에 써야지.”, “개나 소나 글 쓰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미 그는 10권에 육박하는 에세이집을 출간한 작가인데, 일기가 쉬운 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누군가는 일기라고 말하는 그러한 글들이 엮인 책이 족히 10권에 달한다. 그 글들을 쓰기 위해 그가 얼마나 애를 써왔는지. 쓰는 삶이 얼마나 애달팠을지. 그럼에도 그는 일기라고 쉽게 치부하는 말을 듣고 개나 소처럼 이름 없는 아무개가 되어야 했다. 그의 애씀을 한순간 무너뜨리는 그 말들을 글로 옮기며 느꼈을 감정들이 떠올라 어지러운 심정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컴퓨터 앞에 6시간을 내리 앉아 있었는데도 썼다 지웠다만 반복했을 뿐 완성된 문장이 없던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척척 글을 잘 써내는데 나는 왜 이렇게 글이 안 써지나 싶고, 내 이야기를 쓰고 싶은 욕구는 올라오는데 글은 죽어라 안 써지는 상황을 어찌할 줄 몰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함에 침잠해 컴퓨터 앞에 엎어져 울던 날들도 있었다. 첫 책을 출간하고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잘못 도착한 편지를 받는 기분이었다. 나에게 글 쓰는 재능이 있었다면 일기가 그렇게나 힘겨웠을까 싶다.




일기 말고 에세이


 3년을 끊임없이 이어온 글쓰기 수업과 모임에서 만나온 많은 사람이 “일기 말고 에세이를 쓰고 싶어요.”,라고 말할 때면 어색한 얼굴을 티 내지 않으려 애써 웃었다. 그 웃음 사이로 쓴맛이 느껴졌다. 지금도 ‘일기 같은 글’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보거나 그러한 문장을 만나면 쓴웃음이 난다. 일상에세이는 생활이 묻어나는 글로 일기에서 기인한다. 일상에세이의 뿌리는 일기이다. 개념에세이는 일상에세이보다 전문적이고 묵직하지만, 글쓴이의 이야기와 사유가 아예 들어가지 않는 건 아니다. 글쓴이의 이야기와 사유에 사회가 반영되거나 전문적인 정보가 곁들여진 글이라, 일상에세이 쓰기를 훈련하면서 얼마든지 개념에세이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일기는 대개 ‘경험(에피소드)+사유’로 이루어진다. 나의 어릴 적 일기도, 지금 내 아이의 일기도 경험과 느낀 점이 들어간다. 사유는 대상(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생각, 느낀 점, 의견, 소견, 주장 등이 포함된다. 일기를 꾸준히 쓰다 보면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생각을 많이 할수록 사유는 깊어지기에 일기도 점점 발전해 나간다.


 내가 좋아하는 국내의 어느 작가는 수년째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 그가 쓴 일기를 4년째 읽고 있는데, 그 글들이 사회정치에세이, 사회비평에세이, 감성에세이라는 명찰을 달고 책이 되어 세상의 빛을 보았다. 그는 글을 쓴 지 20년이 넘었다고 했다. 일기를 쓰듯 글을 썼는데 아무도 읽지 않다가, 한두 명 읽어주는 사람이 생기고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지금 그의 글을 일기라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앞으로도 매해 년 그의 신간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그가 일기를 멈추지 않는 한. 앞으로도 나의 일기가 발전해 나갈 거라고 기대한다. 내가 일기를 멈추지 않는 한.      


 일기는 일기장에,라는 말은 그 글이 책으로 출간되어 일정의 비용과 시간을 들여 읽을만한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는 걸 안다. 그래서 글쓰기를 지도할 때도, 중. 고등학교 강연에서도, 나의 두 번째 저서에도, 일기에 ‘가치’를 더해주기 위해 독자가 밑줄을 그을만한 문장 한 줄은 넣길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사람의 내밀한 이야기가 읽는 이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지는 방법을 전했지만, 이건 글을 꾸준히 쓰면서 자연스레 터득해 나갈 수 있다.


 나는 어느 글이든 그 글이 지닌 ‘가치’를 논하는 건 오만이라고 여긴다. 천 명의 사람이 한 편의 글을 놓고 보잘것없다고 말해도, 그 글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은 어딘가에 꼭 있다. 그러니까 어떠한 색을 가진 글이든 누군가에게는 주옥일 수 있다. 브런치 계정을 2번 삭제하고 다시 만들면서 글도 다 지워져서 없지만, 3년 전 첫 브런치 계정에 썼던 글을 기억한다. 지금 읽으면 몹시 부끄러운 글인데, 그때도 그 글의 가치를 알아봐 준 사람은 있었다. 나의 글의 가치를 처음으로 알아봐 준 그가 최근 나에게 이러한 말을 했다. 3년 동안 당신의 글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아느냐는 것이었다. 그 성장 과정이 감동이라고 전해 주었다.




새로운 변화 그리고 진통


 브런치스토리가 글을 수익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진통을 앓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배지와 글의 연재 유. 무로 인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원인이다. 돈이 따르면 하기 싫던 일이 좋아지기도 하니 예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노출의 빈도가 낮고 금전이 따르지 않을 뿐, 우리는 여전히 언제든지 브런치스토리에서 글을 연재할 수 있는 매거진을 만들고 브런치 북을 발간할 수 있다. 노출 횟수가 적어도, 배지가 달리지 않아도, 글을 수익화할 수 없어도, 누군가는 나의 글을 읽는다. 라이킷과 댓글로 공감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글이 가 닿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저마다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글쓰기를 시작했을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대부분 돈을 목적으로 시작한 게 아니었다고 짐작한다. 물론, 이슬아 작가처럼 돈을 벌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도 있겠지만 극소수일 것이다. 글쓰기가 주는 이로움이 얼마나 많은지 쓰는 사람은 알고 있다. 상대적 박탈감이 들수록, 물질이 글쓰기를 훼방 놓을수록, 글쓰기의 이로움을 헤아려야 한다. 쓰는 이로움이 쓰는 사람을 이롭게 할 것이므로. 어떠한 새로운 변화가 글쓰기에 영향을 미친다면, 왜 글을 쓰는지에 대해서 깊이 사유해야 한다.


 브런치스토리의 새로운 시도는 나아가기 위함이고, 글쓰기에 있어서 표면적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표면적인 것은 내면에 깃든 견고한 사랑을 흔들지 못한다. 견고한 사랑의 기저에는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 아무런 조건과 목적 없이도 사랑할 수 있어야 헌신할 수 있다. 단행본이 없다는 이유로 에세이 연재의 기회를 잡지 못해 속상한 날이 있었다. 공저가 8권이었지만, 내 책이라고 인정받지 못했다. 실력과 상관없이 단행본이 있어야 한다는 그 말 앞에 무력해진 나는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출간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1년간 3권의 단행본과 1권의 공저를 출간했다. 그렇게 출간작가가 되었지만, 책을 손에 쥐기 전에도 나는 스스로 작가라고 여겼다. 꼭 책을 출간해야 작가인가. 글로 돈벌이를 해야만 작가로 인정받을 수 있나. 작가라는 인정은 누가 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다. 책을 출간하기 전에도 누군가는 나를 작가라고 불렀고, 출간 이후에도 누군가는 나를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작가란, 매일 한 문장이라도 쓰는 사람이다. 글을 완성하지 못해도, 한참 쓰다가 엎어버리는 글이 많아도,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무언갈 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작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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