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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아 Oct 20. 2023

내가 찾은 좋은 삶

 한 부모 아래 태어났어도 저마다의 기질은 다르다. 나는 이것을 성장 과정에서 언니와 남동생을 보며 자연스레 알아갔다. 사회인이 되면서는 유치원 교사로 아이들을 통해 이따금 감각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도 이 감각은 여전하다.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아도 저마다의 기질이 다르다는 사실은 당연해 보이지만 신기한 일이다.  


 나의 첫째와 둘째는 성별이 같고 비슷한 또래이다. 둘 다 남자이고 2살 터울이다. 두 아이는 신생아일 때부터 타고난 기질이 아주 달랐다. 첫째는 너무나도 온순해서 잠을 많이 잤다. 하도 자서 하루에 수유를 몇 번 하지 못할 정도였다. 일부러 깨워서 수유하는 게 일이었다. 둘째는 조리원에 있는 신생아 중에서 잠이 없고 예민한 편에 속했다. 조리원에서는 산모를 쉬게 해 주려고 가능한 새벽에 부르지 않았는데, 나만은 예외였다. 둘째의 울음이 길어지면 낮이고 밤이고 신생아실에서 연락이 왔다. 둘째는 초등학생 3학년이 된 지금도 잠이 길지 않다.




 첫째는 내 외모를, 둘째는 내 성향을 많이 닮았다. 둘째가 예민한 것도 있지만, 어릴 적의 나처럼 엄마를 유달리 좋아하고 많이 찾는다. 나는 중학교 때 어머니를 찾아 서울에 갔다가 길을 잃어버린 적도 있을 만큼 어머니를 좋아했다. 성인이 되고 두 아이를 낳고 나서도 어머니가 곁에 있어 주기를 무척이나 바랐었다. 하지만 나의 어머니는 여전히 같은 일터에서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서 자아가 형성되기 전부터 같은 일을 하셨다. 4살이라거나 5살 즈음부터였던 듯하다.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박명이 밝아올 즈음이면 집을 나섰다. 최근 몇 년 새에는 1년에 한 번 얼굴을 보는 게 전부인 것 같다. 어머니는 밀린 일을 주로 공휴일에 한다. 그래서 남들 놀 때 가장 분주하다.




 언젠가는 원망으로 친정에 발길을 끊기도 했었다. 몸이 자란다고 해서 마음도 자라는 건 아니었다. 자라나지 못한 어린 마음에 어머니의 사랑이 곁에 있어 주는 거라고만 여겼었다. 또 다른 사랑을 알지 못했다. 나는 어머니의 삶과 내 삶을 동일시했었다. 어머니의 삶이 나와 분리되어 있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게 얼마 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되었다고 해서 자식에게만 귀속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어머니에게도 어머니만의 세계와 삶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30년이 넘게 걸렸다. 


 이 세월을 건너는 동안,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점차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한순간에 바뀐 건 아니었다. 결혼하면서 나도 모르게 남편에게 나를 귀속시킨 삶을 살기도 했었다. 이러한 삶이 옳은지에 대해 불신을 갖게 되었던 어느 날, 깨달음이 찾아왔다. 누구나 이 세상에 홀로 빈손으로 와서 홀로 빈손으로 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자 희망도 절망도 없이 담담하게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별안간 찾아왔다. 


 30년의 간 어머니의 부재 속에 성장기를 방치하듯 보내며 내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답을 찾으려 했던 게 결혼 후에도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존재감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잘되지 않았다. 이 세상 사람들이 인생을 알기 위해 태어난 탐구자라면, 아마 나는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맞을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해 묻고 또 물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몇 년 전부터는 이러한 생각이 종종 의식으로 떠올랐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 운명처럼 주어진 사명이 있는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와 같은 생각들. 지금도 여전히 답을 찾는 중이지만, 어느 정도는 알 것도 같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좋은 삶이란 고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좋은 삶은 살아 숨 쉬는 생명체와 같아서 유동적이다. 비슷해 보일 뿐 우리가 타고난 기질이 다르듯, 저마다 삶의 형태도 제각각이다. 수십만 명의 사람이 있다면, 수십만 개의 좋은 삶이 있다. 이것은 생애 주기마다 달라지기도 한다. 10대에는 친구들과 교우를 쌓고 열심히 공부하는 삶이 좋은 삶이었다면, 20대에는 사회인으로의 책임을 다하는 게 좋은 삶일 수 있고, 30대에는 일과 휴식의 균형을 맞추어 나가는데 집중하는 삶이 좋은 삶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찾은 좋은 삶이란, 공헌하는 삶이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삶을 살다 저물어 가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이자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여긴다. 흘러가는 세월처럼 언제라도 이 생각이 흘러가 버릴 수 있지만, 30여 년을 떠돌며 찾은 답이다. 그래서 나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지금은 두 아이를 더 키워야 하는 시기라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지만 준비하고 있다. 




 첫째가 12살이어도 엄마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둘째는 10살이지만 엄마를 무척이나 찾는다. 이런 둘째가 애착에 문제가 있는지 염려되어 몇 해 전에는 애착 검사도 받았었다. 하는 김에 첫째도 애착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두 아이 다 애착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나는 요즘 이런 기도를 드린다. “하고 싶은 일도 많지만, 욕망하지 않을 테니 조금만 더 자유롭게 해 주세요. 제 몸을 자유롭게 해 주신다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게요.”, 하고. 언제부터인가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눈물 나게 아름다운 그 노랫소리를 따라가야 한다는 걸 불현듯 알아차렸다. 두 아이를 과감하게 떼어놓고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 과오를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과오를 범한다.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그 말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보곤 한다. 학대하는 부모를 혐오하며 자랐으면서 자신의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가 되기도 하고, 화목한 가정을 만들겠다는 마음과는 다르게 자신의 부모의 못난 점을 닮아 불화한 가정을 만들기도 한다. 나는 소원이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었다. 나의 작은 품에 안길 만큼 어머니가 야위어 작아진 뒤에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길 것만 같은 생각에 서글펐던 날들도 있었다. 가끔, 어머니와 함께 이고픈 소망과 서글픔이 찾아오지만, 금방 알아차리고 그 마음들을 놓아준다. 나에 대한 연민이나 어머니에 대한 원망 없이, 그저 마음을 바라보다 놓아준다. 같은 하늘 아래 있으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 수밖에 없는 삶을 절대로 대물림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두 아이가 이제 엄마도 엄마가 하고 원하는 일을 하라고 말해 주는 그날을 기다린다. 아직 시작하지 못한 공헌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그날이 꼭 올 거라는 믿음을 의심하지 않으며. 수 없이 물었어도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걸어갈 삶의 방향이 어디인지 짐작할 뿐이다. 내가 왜 유치원 교사라는 직업을 거치고 사회복지사 자격을 갖추었는지에 대한 이유도, 그 삶의 방향에 있을 것만 같다. 그 길목엔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이 있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불만하거나 한탄하게 된다. 생각만 하다가는 마음을 놓쳐버리고야 만다. 불만과 한탄이 찾아오기 전에, 마음을 놓쳐버리기 전에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지금 가능한 일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이 미비할지라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지라도, 이어나가려고 한다. 얼마전부터 보육원으로도 갈 수 없는 아이들을 구조하는 베이비박스에 글을 써서 번 작은 정성을 기부하기 시작했다.     


 둘째는 내가 매일 저녁이면 컴퓨터 앞에 앉는 걸 알면서도 1시간마다 찾아와 재잘거린다. “엄마, 언제 끝나?”, 라며 재촉한다. 두 번이나 “아직인데. 딱 한 시간만 더 주면 안 될까?”, 하고 부탁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한 편의 글을 썼다. 이제는 아이의 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조금만 더 글 쓸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지만, 한 편으로 지금의 순간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감사하다. 




 한 번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한 번은 범죄에 노출되면서, 한 번은 스스로 죽음의 문턱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서 감사함을 느끼고 해가 저물어 갈 때면 생의 마지막을 생각하게 된 게. 매 순간이 마지막인 듯 살고 싶다는 생각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껌딱지가 되어버린 죽음이라는 단어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술을 마셔보기도 했지만 소용없다. 그런데 죽음은 스승이 되어, 나를 일깨운다. 훗날, 내 삶을 돌아봤을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오늘임을 가르친다. 


 만약, 나에게 마지막 하루가 주어진다면 오늘처럼만 살고 싶다. 아침이면 가족을 위해 밥을 짓고, 도서관으로 달려가 공부하고, 두 아이와 놀다가 숙제를 봐주고, 또다시 밥을 짓고, 컴퓨터 앞에 앉아 무언갈 주절거리며 쓰고, 퇴근한 남편의 처진 어깨를 마음으로 감싸 안고, 밤이면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자는 등을 토닥이고. 그렇게. 그렇게. 마지막 결정적인 그 찰나의 순간엔, 하늘을 눈에 담고 불어오는 바람을 딱 한 번만 더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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