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가 되고, 먹물이 되고, 붓이 되고, 활자가 되고

by 이수아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줄 땐 내가 가진 것의 많은 부분을 전한다. 시간과 마음 그리고 물질적인 것 등인데, 가족을 대하듯 한다. 그래서 가끔은 상대방이 좋아하면서도 부담을 느끼고, 권리로 받아들여 호구 취급을 당한다. 이즈음 되면 나도 마음을 거둬들이고 잠시 거리를 두게 된다.

상대방이 권리를 내세우게 만든 것에는 내 잘못도 있을 것이어서 일차적으로 나의 언행을 단속하고 이차적으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데미지를 입으면 서로를 위해 관계를 내려놓는다.

마지막으로 상대방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마음뿐이라 온 마음 다해 어디에서든 잘 지내길 바라고 하고자 하는 일이 잘 되길 빌어준다. 다시 내게로 오려고 하면 곁을 내어주지만 나름의 범위를 정하고 서로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일정 선에서 관계를 유지한다.



나는 오늘 나의 선생님의 강연에 마음을 전하러 가고 있다. 거리도 거리이지만 차표가 이른 시간 때밖에 없어서 새벽부터 일어나 집을 나섰다.

선생님을 기쁘게 해 드릴 작은 현수막, 마흔으로 접어들어 체력을 보강할 건강음료, 자리를 빛내줄 꽃다발, 새로 구입한 선생님의 책 두 권을 바리바리 싸들고. 상대방이 내 마음을 권리로 받으면, 내 시간과 돈 그리고 마음을 어디까지 써야 할지 계산기를 두드리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진심을 전하는 순간만큼은 감사한 마음만 생각한다.

작년 한 해는 집 밖을 나서고 누군가를 대면하고 낯선 장소에 가는 게 몹시나 두려워 집안에만 살며 병원 치료와 심리상담을 병행하며 지냈다. 둘째도 놀이치료를 받고 있는데, 집 근처에서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중년의 여성지기님께서는 "엄마 상태가 이러니 아이까지 온전하지 못한 거예요." 하고 현실을 즉시 하게 하는 냉정한 말씀을 하기도 했었다.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으니까 몹시나 가슴 아팠다. 나는 나를 돌보는 것조차 버거워 아이가 정서적인 지지를 원할 때 그 시기를 놓쳤다. 그래도 꾸준히 노력하면 둘째도 좋아질 거라 믿는다. 치료시기를 놓치지 않았다는 걸 위안삼아 지금부터라도 아이에게 정성을 다하면 된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작년 한 해 선생님의 회사가 있었기에 줌으로라도 글쓰기 수업을 지속할 수 있었고, 일 년간 회사에서 하는 서포터스를 하며 비대면으로 타인과 소통할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집에서만 지내는 삶이 고착되면 안 된다며 스스로 뚫고 나가라고 하셨고, 나는 작년 겨울부터 절에 다니며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는데 에너지를 들였다. 1월의 어느 날 날짜를 정해놓고 사회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두 달을 매주 연습하고 3월에 선생님의 수업에 참여했다.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일과 낯선 장소에서 불안 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책을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 나에게도 한 없이 넓은 마음을 보여주시는 분이 있다. 나의 선생님께서는 내가 하는 모든 걸 수용하고 인정하고 응원해주신다. 실수를 해도 관용을 베풀고 부담스러운 모습도 포용해주시는 그러한 관대함을 가지신 분.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이렇게나 관대하게 대해주는 건 난생처음이어서 소중한 인연에 감사하고 또 감사드린다.

그럼에도 한 번씩은 선생님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어쩌나 하고 괜한 걱정을 하게 된다. 오로지 내가 마음 편이 맺고 유지할 수 있는 관계는 책과 글쓰기뿐이다. 나는 가끔 망상에 가까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지니의 램프가 나에게로 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면, 이러한 소원을 빌고 싶다.


"백지가 되고, 먹물이 되고, 붓이 되고, 활자가 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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