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송이들의 춤과 활자의 춤

by 이수아

책을 기획하는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용인시와 이천시 경계에 있는 여러 작은 마을 중 제일 2리에 살고 있다.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차의 앞 유리에 무엇인가 앉았다 사라지는 듯했다. 정체 모를 그것은 아마 전봇대를 지나오며 번진 불빛이었을지도 모른다. 집과 가까워지면서 차의 앞 유리에 더 많은 무엇인가가 앉았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가로등이 없는 곳에서도. 너무 순식간에 닿았다 사라져서 몰랐는데 주차하고 나서 그게 눈이었다는 걸 알았다.


지상 주차장이 아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미세한 눈송이.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내리고 있는 눈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흘렀을까. 그 짧은 사이 눈은 폴폴 내리기 시작하더니 제법 굵은 눈송이들이 하늘을 타고 내려왔다.


굵고 가녀린 눈송이들이 춤이라도 추는 듯 금세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와, 눈이다.”하는 탄성이 나왔다. 불과 몇 분 전에 눈이 내리는 걸 알았으면서 이제 막 알게 된 사람처럼 감탄을 자아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눈이 선명해지고 나서야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다. 눈송이들의 춤을. 자신을 알아봐 달라는 듯 기를 쓰며 내리는 눈 같았다.




나를 알아봐 주길 바라며 기를 쓰는 건 눈송이들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선명해지기 위해 4년째 부단히도 굵고 가녀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언젠가 나에게 글을 처음 지도해 주신 L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에세이를 소설처럼 쓰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면서 묘사를 거듭 말씀하셨다. 그때를 떠올리면 나는 마치 소설책 《라이팅 클럽》에 나오는 하나의 인물인 영인이 된다. 소설 속 J 작가는 영인에게 말한다.


“묘사, 묘사, 묘사를 해라.”(p.172)


L 선생님께서 이렇게나 묘사를 강조하시는 건 글이 재밌어야 하는 이유에서였다. 현대인은 시간이 없다. 더군다나 책을 안 읽는다는 한국 사람에게는 재미가 있는 글이 그나마도 읽힐 확률이 있으니까 에세이를 소설처럼 맛깔나게 쓰라는 것이었다. 재미없는 글은 맛없는 음식이고 재밌는 글은 맛있는 음식과도 같다는 걸 알게 된 뒤부터 가슴에서 하나의 욕구가 꿈틀거렸다.


“그래, 기왕 쓸 거면 에세이를 맛깔나게 써야겠어.”




그때부터 소설 수업을 들으며 구조를 파악했다. 소설형식을 알고 에세이에 녹여내면 된다고 믿으며. 어떻게 하면 잘 녹여낼 수 있을지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웠다. 그렇게 백지 위에 끝없는 도돌이표를 찍어댔다. 그러다 알게 된 건, 에세이는 글쓴이의 경험에 자연스레 배경, 인물, 사건이 들어 있어서 소설에 들어가야 하는 3대 요소가 없어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에세에를 소설처럼 쓰기 위한 핵심은 묘사와 진술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느냐였다. 한 편의 에세이의 호흡은 단편소설보다 짧기에 묘사를 장황하게 하면 글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것도 알아갔다.


에세이에 녹아나는 묘사는 하나 또는 두 개의 문장이면 충분하고 진술과 한 문장으로도 어우러질 수 있다. 뛰어난 묘사력은 아니어도 드디어 소설을 빌어 소설형식의 에세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고 나의 첫 번째 책에 담아내었다.


L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체득하신 조언도 아낌없이 해 주셨다. 그중 하나가, 작가는 나이를 드러내지 않는 문장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독자가 글을 읽었을 때 글쓴이의 연령대를 짐작할 수 없어야 한다는 것. 실제로 L 선생님의 글은 해가 갈수록 나이를 거꾸로 먹는 듯한 느낌이다. 글쓴이는 60대인데 30대가 쓴 글처럼 읽힌다. 때로는 10대 미만의 어린이가 쓴 글 같기도 하다. L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글에 나이를 들키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연마했다.


당시의 나는 글에 성숙미를 넘어 완숙미의 감각을 담아내고 싶었다. 또다시 흰색 바탕을 어지럽혀 놓고 다시 말끔하게 치우길 반복했다. 이러한 노력의 빛은 내 책을 읽은 몇 분의 독자분에게 받을 수 있었다.


“30대가 아닌 줄 알았어요. 책을 읽었을 땐 작가님이 50대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옛날 글체를 사용해서는 아니었다. 나는 실제로 옛날 글체(~하였다. ~했으나, ~읍니다. 등과 같은 글씨 체)를 사용하지 않았다. 독자분은 감성에서 묻어나는 성숙미를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고뇌로 가득 찼던 지난날을 알아주었다. 이뿐 아니라 구구절절 이야기와 마음을 쏟아내는 걸 조심하려는 애씀도 있었다. 이것은 L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에서부터 출발했다.


“뭘 쓰고 싶은지 알아요. 그런데 작가는 쓰고 싶은 걸 다 쓸 수 없어요. 너는 지금 절제력이 필요해.”

나와 수강생들 그리고 L 선생님의 글을 비교해 보니 나의 글은 너무나도 구구절절하게 느껴졌다. 상세하고 간곡한 건 좋은데 구구절절한 글이 되지 않으려면 나도 모르는 사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마음의 소리에서 글에 담아낼 만한 게 무엇인지 가려내는 능력이 필요했다.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해도 글을 읽는 입장에 서서 끊임없이 찾아 헤매었다. 듣고 싶은 나의 마음이 소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로부터 선생님 곁을 떠난 지 2년이 된 지금, 나만의 글로 책을 출간한 이후 계속해서 글에 나를 담금질하며 깨달았다. 글쓰기에서 중요한 건 어떠한 스킬도, 나이도, 절제력도, 아니라는 것을. 가능한 단문을 쓰되 읽는 맛을 잃지 않기 위해 장문을 곁들이는 것, 장문을 넘어선 만연체를 구사하지 않는 것, 글에 에피소드가 꼭 들어가야 하는 것, 생동감 있게 표현 하려고 묘사를 연습하는 것, 미완성된 문장을 쓰면 안 되는 것, 가능하면 접속사를 사용하지 않는 것, 날짜와 요일 그리고 시간을 정확히 명시해야만 하는 것, 사자성어나 한자어를 사용하면 안 되는 것, 관념어를 금기하는 것, 그 어떠한 것도 글쓰기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동안의 나는 지도자의 말에 기대는 글을 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글에 대한 평가는 지도자가 아닌 어딘가에 있을 나의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에게 받아야 하는 거라는걸 이제는 안다. 같은 글을 읽고도 누군가는 ‘이러저러해서 좋다.’하고, 누군가는 ‘이러저러해서 싫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글쓰기에서 중요한 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담아내는 것이다. 지금의 나의 모습을, 마음에서 솟구치는 마음을, 그저 활자로 물들이면 된다. 요즘 나는 자주 말한다.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처럼 습관적으로 되뇐다.


“좋은 글도, 나쁜 글도, 없다. 누군가는 너의 글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싫어해. 그러니 그저 쓰면 되는 거야.”

이 세상의 모든 글은 완벽하지 않다. 좋은 글도 나쁜 글도 없다. 그저 저마다의 취향만 있을 뿐이다. 내가 거쳐온 글쓰기 수업에서 받은 피드백은 셀 수 없이 많아서 다 기억하지도 못할 지경이다. 그 수많은 조언의 10의 9할은 지도자의 취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완벽한 글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인생처럼 글쓰기에도 정답은 없는데 어떻게 완벽한 글이 있을 수 있느냐고. 글은 말이 되게만 쓰면 된다. 망상 같은 글을 써서 혼란을 초래하면 안 되는 거니까.




나는 여러 작가님에게 글쓰기 수업을 받아왔고 지금도(2023년 1월 기준) 누군가의 지도를 받고 있다. 그러면서 누군가 걸어온 쓰는 길을 답습하며 글쓰기에 답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현실 자각 타임에 빠졌었다. 그동안 해왔던 모든 글쓰기 연습과 훈련이 헛수고 같아서였다. 그런데 나는 또다시 답없음의 답습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많은 시간 (하루 5시간 이상 성실히 꼬박 만 3년)을 들여서 했던, 글의 구조와 문장을 뜯어고치던 날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관한 모든 과정은 고수가 되어가는 길이었다고 (길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고수가 되고 싶어서 답 없음을 답습하는 것이다. 이건 순전히 내 욕망일 뿐 굳이 글쓰기 고수가 될 필요는 없다. 내가 바라보는 고수는, 알지만 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쉬운 글이 좋다. 마음을 울리면서도 쉬운 글을 쓰는 작가가 되기를 스스로 바란다. 진정한 고수는 어렵게 쓸 줄 알면서도, 기교를 부릴 줄 알면서도, 보란 듯이 내세울 줄 알면서도, 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누군가에게 실력을 뽐내고 보여주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기에. 나의 마음을 고하는 것으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쓰는 글 아닌가.




눈은 처음부터 눈이 아니었다. 구름 안에만 있던 작은 물방울이었고, 물방울들이 모여 하나가 되었고, 무게를 같게 되었고, 무게를 견디지 못해 세상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구름알갱이가 바로 눈이다. (바깥 기온, 0도씨 –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 그 이름- 에 따라 눈이 되기도 하고 비가 되기도 한다.)


구름 속에만 존재하던 작은 물방울처럼 내 안에만 머무는 언어가 있다. 물방울이 구름이 되듯 나의 언어가 모여 문단이 되고 문단이 모여 글이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한 편의 글은 힘을 갖게 된다. 그 힘에는 목소리가 있다. 이걸 견디지 못해 세상으로 쏟아져 나온 글들이 바로 내가 지어 올린 한 권의 세계와 아홉 권의 행성이다.


집 앞에서 내리는 눈송이들의 춤을 바라보며 잠시 눈을 감고 귀 기울였다. 백색소음이 전부였고 눈이 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리 없는 것도 눈만이 아니다. 나는 4년째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계속 흩날리고 있다. 나를 알아봐 달라는 듯 기를 쓰며 춤을 추고 있다. 아무리 손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깊은 하늘을 타고 내리는 눈송이들처럼, 아무리 손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깊은 나의 심연을 타고 오르는 활자의 춤을.


“좋은 춤도, 나쁜 춤도, 없다. 누군가는 너의 춤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싫어해. 그러니 그저 추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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