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
최원돈
하늘은 맑고 푸르다. 멀리 백두 대간 준령이 하얗다.
새로 난 국도는 불영계곡 산마루를 가로질러 동해로 이어졌다.
파란 바다다. 동해는 푸르다 못해 검은 코발트 빛으로 물들었다.
몇 시간을 달려온 답답하던 가슴을 확 뚫어준다.
평해 마을로 접어든다.
백암 온정으로 가는 길섶 겨울 배롱나무만 한가롭다.
백암길은 아직도 공사 중이다. 호젓했던 옛길이 그립다.
산마루에서 보는 백암산 아래 온정 마을은 옛 모습 그대로다.
언제나 이곳에 들어서면 고향의 맛이 느껴진다.
"여기 오면 고향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왠지 마음이 풀어지네요 “
"먼 길 오느라 수고들 했네"
먼저 온 누님 내외가 우리를 맞아준다.
부산 아우네만 빼고 7명이 함께 만나 숙소인 <엘지 생활연수원>으로 들어섰다.
우리들은 겨울이면 이곳으로 겨울 온천 여행을 자주 왔다. 젊어서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찾았지만, 지금은 특별히 숙소가 마련되어야 오게 된다. 며칠 전 누님 내외분이 가족과 함께 먼저 여행 왔다 다른 식구는 돌아가고 오늘 우리와 합류했다. 특별히 누님네가 하루를 더 연장해 놓았다.
온천목욕으로 지친 몸을 풀어본다.
온천장은 옛 그대로지만 온천수는 옛 물이 아니다. 따끈했던 온천수는 미적지근하다. 그나마 한 시간이나 몸을 담갔더니 겨우 피부가 매끈해진다.
저녁 식사는 이곳 한식당에서 해물전골에 불고기 정식을 시켰다. 소맥 한 잔씩 하며 모두 즐겁게 회포를 풀어본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또 온천욕장으로 향한다. 어제보다는 물이 따끈하다.
냉탕 온탕을 번갈아 하지만 물이 뜨겁지 않아선지 냉탕에서는 몸이 쭈뼛해진다.
아침 식사는 구내식당에서 한다. 이곳은 직원 가족들을 위한 생활연수원이라 숙박비는 무료이고, 음식은 실비로 저렴하다. 하지만 음식 맛은 집밥처럼 알차고 맛이 있다. 또 하나 이곳의 즐거움은 식사 후 차 한잔을 하면서 담소를 나누는 일이다.
나는 주로 쌍화차를 즐겨 마신다. 자기 잔에 대추와 땅콩으로 만든 따끈한 쌍화차의 맛은 일품이었는데, 오늘 쌍화차는 종이컵에 나왔다. 맛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영 아닌 것 같다.
후포항 푸른 바다 위로 하얀 갈매기가 노닌다.
"언제나 허물없이 받아줄 수 있는 곳
여기 바다와 하늘은 화장기 없는 상태
누구라도 맞이할 수 있는 너그러움을 지녔다
동기산, 오징어 꽁치 도다리 문어가 합창하고
붉은 대게가 무도회에 참가한다 "
-후포 찬가 박의보
장터 마당에서 각설이 엿장수의 가락이 구성지다. 우스운 모양을 한 각설이 엿장수가 다가와 맛보기엿을 내민다. 한 조각 집어 들었더니 엿을 사란다.
"세상에 공짜가 없네요'
"그냥 하나 팔아줍시다. “
회센터 안동집에서 횟감을 고른다. 이 집주인은 아내의 단골이 되어 명절 때마다 문어를 주문한다. 주인이 좋다는 데로 골라 담아 회를 떴다. 오늘따라 횟감이 풍성하다. 농어, 도다리 등 넣어주는 데로 회를 뜨고 남은 것은 매운탕감이다. 단골이라 멍게와 한치는 서비스로 내놓는다.
소주잔을 가득 채워 이야기꽃을 피운다.
"여보게 송산, 아우에게 호 하나 지어주시게"
갑자기 새 형님(姉兄)이 나를 보고 웃으며 말한다.
"이제 저 사람 나이도 들고 하니 호가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네 새 형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합니다."
"나이 든 동생 이름 부르기도 거북하고 호가 있으면 멋이 있지 않겠는가."
듣고 보니 네 살 아래 아우지만 이름을 부르기도 그렇고, 호칭도 마땅찮아하던 참이다.
떠오르는 글자가 ‘형 자’로 하면 어떨까 싶다.
‘형산’으로 하면 어떨까 싶어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형산지옥 (荊山之玉)이란, 중국 형산에서 나는 백옥이라는 뜻으로, 흰 옥돌을 이르는 말인데, 어질고 착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란다.
"형산(荊山)이 어떨까요."
"그 뜻이 어질고 착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 하네요."
"아이고 형님, 어질고 착한 것은 제하고는 안 맞아요."
"이 사람아, 앞으로 그렇게 살면 되지 않는가."
모두 좋다며 잘 어울린다고 하니 본인도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송산 아우, 형산이라. 그렇게 하세"
모두 손뼉을 친다.
."오빠. 이참에 막내아우 호도 지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구나, 송산, 형산이니 ’이산‘으로 하나"
"오빠, ’이산‘이 좋겠어요"
우리 형제들 이름은 "원형이정(元亨利貞)"에서 따왔다.
그러니 ’이산‘이 좋다고 한 것이다.
"이산이라, 그거 좋겠네, 그렇게 하세. 이 사람은 여기 없지만 뭐 싫다고야 하겠는가."
’ 이산(以山)‘ 굳이 그 뜻을 살핀다면 ’ 써 以‘자는 "무엇을 가지고" "무엇으로 인하여"라는 부사이다. 그러니 "산을 가지고" "산으로 인하여"가 된다. 서로를 연결해 주는 말이리라, 없어서는 안 되는 글자이다.
즐겁게 떠들면서 유쾌한 정담(情談) 끝에 두 아우의 호도 생겼으니, 이 또한 즐겁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아니한가.
’생활연수원‘에서 2박을 하고 아쉬워 길 건너 ’스프링스 호텔‘에 하루 더 있기로 하고 짐을 옮겼다. 이 호텔은 백암온천의 원탕이란다. 로비 카운터 벽에 걸린 사진이 예사롭지 않다. 1912년 ‘백암 온천관’ 사진에는 평해 서쪽 3리 백암산 아래 섭씨 42도의 용출수 萬病根治 靈泉(만병근치 영천)라고 쓰여 있다.
오늘 후포항 해파랑길 하늘은 검은 구름에 잠겨있다.
포구의 겨울 바다에는 하얀 갈매기 떼만 분주하다.
끼룩끼룩 노랫소리가 청량(淸凉)하다.
정월이라 대 보름날 누이동생 고희(古稀) 날을 잡았다. 원래 생일은 정월 초이틀이지만, 정월 보름을 기려 생일 턱을 냈다. 후포항 안동식당에서 영덕대게 잔치를 벌였다. 푸짐한 잔칫상 차려놓고 세월의 무상보다 동기간 우애를 되새긴다. 한바탕 떠들썩하게 즐거움을 만끽했다.
"오늘 영덕대게 맛이 최고네요"
"그렇네, 아귀탕도 일품이고"
"무슨 음식이든 누구랑 어디에서 먹느냐에 달린 것 같아요."
"내년부터 정월 보름날은 백암에 와야겠어요"
저녁에는 호텔 방에서 뒤풀이했다. 케이크도 준비하고, 사과도 깎아내고, 점심때 안동 아지메가 누이와 갑장이라며 싸준 방어회도 올려놓았다. 모두 손뼉을 치며 생일 축가를 부른다. 소맥으로 건배하며 칠순 축가를 목청껏 불렀다.
이른 새벽, 백암 원탕에 들린다. 온천 욕장은 자욱한 김에 서려있다.
넘치는 온천수에 몸을 담그니 온몸이 짜릿짜릿해진다. 뜨거운 열탕과 얼음장 냉탕을 분주하게 들락이니 온몸이 노긋노긋 삭신이 다 풀어진다. 한바탕 열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반복하니 온몸이 지쳐온다. 넘쳐흐르는 열탕 바닥에 드러누워 지친 몸을 달랜다.
백암온천의 전설이 떠오른다.
신라시대 한 사냥꾼이 창을 맞은 사슴을 쫓다가 날이 저물어 포기하였다. 이튿날 사슴의 행방을 찾던 사냥꾼은, 사슴이 밤새 누워 몸을 녹이다 달아나는 곳을 발견하고 달려갔더니 뜨거운 온천수가 솟아올랐다. 이곳에 사람들이 돌담을 쌓아 온천이 되었단다.
먼 훗날, 1912년 일제 강점기에 '백암 온천관'이 만들어졌다. 세월이 흘러 한 때는 우리나라 제일의 온천장이 되었다. 이제는 그 옛날 명성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겨우 명맥만 유지하니 세월 따라 변하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 아니런가.
겨울 여행은 뭐니 뭐니 해도 온천 여행 만 한 것이 없다.
추운 겨울 하얗게 눈이라도 내리면 더욱 좋다. 가족들과 함께하면 금상첨화이다.
우리 5남매는 오래전부터 ‘형제계’를 모아 겨울이면 이곳 백암으로 겨울 여행을 하고 있다.
이곳 겨울여행의 추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얀 겨울 백두 대간의 준령을 넘으며 쏟아지던 눈발을 헤치며 10시간 넘게 달려,
눈보라 속 설경은 아득한 옛 추억이 되어 겨울이 되면 우리를 유혹한다.
이번 겨울 여행 또한 먼 훗날 우리들 가슴속에 그리움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하늘에서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온다.
”우째든지, 너희들은 우애 있게 지내거라 “
50년 전 아내에게 한 어머니의 유언이다.
”어무이, 이만하면 저희들 잘 살고 있지예“
백암의 아침 햇살은 눈 부신다.
이제 검은 머리 백발이 되어 옛 백암 온천관이었던 이 호텔 커피숍에서 이 글을 쓴다.
커피숍 주인이 방금 원두로 내려준 커피 향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향긋한 커피 향 속에 옛 추억을 그려본다. (2025. 0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