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연지기, 장성에 오르다

by 최원돈


호연지기, 장성에 오르다

- 북경 기행 (2)

최원돈


북경 모전욕(慕田峪) 장성에 도착하니 하늘은 더 높고 푸르다.

이른 아침에 숙소를 출발해 두 시간 남짓 걸렸다. 오는 길에서 자작나무 숲도 만나고 푸른 강물도 스쳐 지났지만 모두 말없이 오수 삼매에 빠졌다.


무 티엔 위(慕田峪) 장성 안내문을 읽는다. 이 장성은 1368년 명나라 주원장의 장수 서달이 북제 장성 유적지에 건설했다.

“봄에는 봄꽃, 여름에는 여름 초록, 가을에는 가을 단풍잎, 겨울에는 겨울눈으로 사계절마다 특색이 있어 ‘만리장성’에서 모전욕이 가장 돋보인다.”

오늘 일정은 이곳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올라,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가, 14호 누각에서 영웅대 누각까지 오른다.


“모전욕(慕田峪)은 ‘밭을 그리워하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누가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셔틀버스를 내리니 ’中華夢石城(중화몽석성)‘이라 쓴, 계공(啓功) 선생의 자연석 비석이 우람하다. 케이블카 속에서 보는 산세가 예사롭지 않다.

멀리 산 등성이에는 ’忠誠 毛主席‘ 하얀 돌 글씨가 또렷하다. 모택동이 썼다는 시비의 붉은 글씨도 시선을 붙잡는다.


“不到長城 非好漢 (부도장성 비호한)”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진정한 사내가 아니다.


호한파(好漢坡) 가는 길을 따라 걷는다. 성벽 아래 오솔길을 따라 걷는 길이 상큼하다. 멀리 장성을 따라 펼쳐지는 준령들이 아득하다.


나는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라 역사의 흔적을 오르는 한 사람의 대장부가 되고 싶다.

장성은 처음부터 나를 시험한다. 가파른 오르막, 끝이 보이지 않는 돌계단, 발아래로 펼쳐지는 깊은 골짜기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압도한 건, 이 성벽이 간직한 세월의 무게였다. 천년의 시간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은 이 돌들은 묵묵히 말하고 있었다.


“너는 무엇을 위하여 장성을 오르는가.”


누각 구간을 지나면서 성벽은 점점 야성적인 얼굴을 드러낸다. 돌은 거칠어졌고, 손에 닿는 표면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땀은 등을 타고 흐르고, 다리는 점점 무거웠지만 멈출 수 없다. 가슴을 파고드는 산바람을 들이마시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성벽을 따라 오른다. 그 바람 속에는 사람의 숨결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의 시간이 깃들어 있었다.


“이 성벽을 쌓으면서 얼마나 많은 민초들은 울부짖었을까.”


지금은 이 길이 호한파(好漢坡)와 영웅대(英雄臺)를 기리지만, 성벽 돌 하나하나 켜켜이 묻어있는 백성의 고통은 그 누가 알아줄까.


영웅대 누각을 앞둔 마지막 오르막은 말 그대로 거대한 ‘벽’이었다. 좁은 계단은 몸을 구부려야 겨우 오를 수 있었고, 발끝마다 바위가 돌출되어 있다. 한 손으로 돌난간을 잡고서야 걸음을 뗄 수 있다. 숨이 목까지 차올랐고, 다리는 후들거려 손을 짚고서야 오를 만큼 힘겹다. 성벽의 돌계단은 발 하나 겨우 걸칠 정도로 좁고, 경사는 허리를 반쯤 접은 채 올라야 할 만큼 가팔랐다. 한 발을 내딛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무릎은 떨리고, 등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여기까지 왔다면, 끝까지 가야 한다.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니, 눈앞이 확 열린다.


마침내 영웅대 정상에 오르니 세상은 조용해진다. 눈앞에는 장쾌한 풍경이 펼쳐졌다. 능선을 따라 흐르는 장성의 몸통이 길게 뻗어 있고, 그 위를 지나온 나의 발자국이 아득히 이어졌다. 깊은 골짜기와 저 멀리 산맥의 겹겹 능선이 어우러진 장면은 한 편의 대서사였다.


“영웅대. 이곳은 영웅만이 설 수 있는 자리인가.”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은 더 높고, 장성의 곡선은 그 위용을 드러냈다. 산등성이를 타고 흘러가는 성벽은 끝없이 이어졌고, 그 위를 지나온 내 발자국들이 희미하게 머릿속을 스쳐 갔다. 발밑으로는 깊은 골짜기, 멀리 보이는 능선 위에도 성벽은 흐르고 있었다.


이 순간, 어떤 말도 필요 없다. 숨결이 멈춘 듯한 침묵 속에서, 나는 마치 거대한 시간 위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갑자기 나는 영웅대 성벽 난간을 부여잡고 상념에 잠겨 든다.


“지금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백척간두에 서 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 속이다. 이럴 때 우리는 누구를 믿고 따라야 할 것인가. 스스로 판단할 수도 길을 찾을 수도 없다. 이럴 때야말로 참된 지도자가 필요하다.”


지도자, 어떤 지도자가 참된 지도자일까.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지도자는 보이질 않는다. 오죽하면 테스 형에게라도 묻고 싶다. 이럴 때 맹자 선생은 무어라고 할까. 호연지기 대장부를 찾아보라고 할까. 부동심을 실천하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할까. 과연 ‘不動心’을 유지할 수 있는 지도자가 있기는 하는 걸까.


한참을 상념에 잠겨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올 때와는 또 다른 고역이었다. 계단 하나하나가 무릎에 충격을 줬고, 햇볕에 달궈진 돌 위로 그림자가 일렁였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몇 번이나 멈춰 앉아 숨을 골라야만 했다. 하지만 마음속은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나는 오르기 전보다 더 강해져, 그 고된 여정이 나를 조용히 단련시켰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모전욕 장성을 올라 무엇을 보았는가.”


모전욕 장성. 돌로 쌓은 침묵의 길 위를 걷는다.

천년의 세월을 이고 선 이 거대한 구조물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아진다. 높은 성벽 위에 서면 비로소 알게 된다. 인간이 쌓은 길이지만, 인간을 넘어서려 했던 길. 그 길이 장성이었다.

그 길 위에서 천년의 시간을 보았다.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것. 산을 마모시키고, 사람의 뜻을 흐리게 하며, 결국엔 존재조차 잊히게 하는 것. 그러나 그 모든 소멸의 힘 앞에서도 장성은 버티고 있었다. 풍화된 석벽의 틈새 속에서, 무너짐과 맞서는 의지가 돌처럼 남아 있었다.

그 길 위에서 나를 보았다.

그동안의 욕망과 두려움, 허영과 후회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흘린 땀방울마다, 무언가가 비워졌다. 어쩌면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더 가지려 애쓰기보다, 무엇을 덜어낼 수 있는가를 먼저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호연지기란, 거창한 기개가 아니다.

어떤 고난에도 흔들림 없는 삶이란, 끊임없이 이어지는 장성의 곡선과 같다. 곧지 않으나 단단하고, 휘어졌으나 무너지지 않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야만 길이 되는 존재. 그 길 위를 걷는다는 것은, 단지 여행이 아니다. 자신을 마주하고, 자기 삶을 해석하는 고독한 사색의 길이다.


나는 모전욕 장성을 올라, 세상을 보았고, 역사를 느꼈다.

마침내 ‘나’라는 존재의 무게를 조용히 껴안는다.

나는 과연 호연지기를 꿈꿀 수나 있을까.

(2025.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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