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위의 초상화
-이선재 수필집을 읽고
최원돈
"人生
'지' 知를 움직이면 날카롭고
싸늘하여 깊어만 가고,
'정' 情에 흐르면 돛단배와 같이
어쩐지 서글프고,
'의지' 意志에 이르면 드디어 고민을 하고 이상을 낳는다.
인생人生은 거친 세파를 허덕이며
왔다가는 영원한 나그네여라."
누구의 시인지는 알 수 없다.
이선재 작가는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시라 했다. 한쪽 다리를 절은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 시를 평생을 잊지 않고 외우고 있다.
초갓집 위로 겨울 햇빛이 가득하다.
"오늘따라 거실 벽에 걸려있는 < 초가집> 그림이 내 눈길을 사 로잡는다. 야트막한 산기슭에 작은 초가집 한 채가 외따로이 서 있다. 죽데기를 적당히 엮어서 두른 울타리 안에는 아직 잎이 돋 지 않은 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사립문 밖엔 넓은 수레가 앙상 한 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적막한 초가집 양옆으로 산수유와 살구꽃이 피어있는데도 왠지 서글픈 느낌을 준다. 뒷동산 위에 펼쳐진 저녁노을에 불그레해진 조각구름들과 초가집 전경의 질박한 색조와 질감이 한데 어우러져 몽환적이고 항토적인 정취를 자아내는 풍경화는 반백 년 전 내 여학생 때 미술 선생님의 작품이다."
이선재 회장님이 팔순의 연세를 훌쩍 넘기고 책을 냈다. 그동안 수필공부를 하며 틈틈이 쓴 주옥같은 글이다. 나는 이선재 문우를 회장님이라 부른다.
6년 전 행복한 글쓰기 반에 함께 들어와 수필공부를 하고 있다. 그해부터 에세이강남 동인지를 만들었다. 3년 후부터 문학회를 물려받아 이선재 문우가 회장을 맡고 나는 사무국장을 맡아 동인지를 두 권을 만들었다. 그때 회장님은 내가 일하기 편하도록 나의 의견에 따랐다.
지금은 내가 회장직을 물려받았지만 아직도 명예회장으로 물심양면으로 도와 주고있다. 늘 후덕한 인품을 실천하는 분이다.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인생을 살고 있다.
이선재 수필집 <지붕 위의 초상화>의 표지 그림은 고등학교 때 미술선생이었던 김찬희 화백의 그림이다. 그 때 전시회를 마치고 받은 선물이었다. <초가집>을 선물 받은 5년 후 작고하셨다.
이 그림은 평생 동안 회장님 댁 거실에 걸어놓았다. 미술선생님이 말씀 하신 "내 그림을 알아보고 끝까지 사랑해 줄 사람이라면 그냥 내줘도 기쁘겠다."는 소망을 실천하였다. 이 그림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그 시절의 그리움이 깃든 그림이어서 더욱 소중했으리라.
이선재 수필집에는 어린 시절 겪었던 고난의 세월이 잘 녹아있다.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황해도청에 다니실 때의 우리 집 뜰에는 사철 피고 지는 꽃밭이 있었고 각종 푸성귀와 토마토 오이 가지가 열리던 텃밭도 있었다. 한여름에 옥수수가 여물고 있는 울타리 안쪽에서 동네 아이들과 술래잡기하다가 엄마가 쪄주던 옥수수를 하모니카 부는 시늉을 하면서 먹으며 웃어댔다."
공산치하의 야욕으로 사회가 혼돈 속으로 빠지고 아버지의 출장은 월남으로 이어졌다.
삼팔선엔 월남하는 사람들과 월북하는 사람들로 삼엄한 경계망이 쳐졌다.
"엄마는 집안에 사람이 사는 것처럼 보이려고 불을 환하게 밝혀 놓고 살림살이를 그냥 남겨놓은 채 사람을 사서 이불과 옷 보따리와 그릇 몇 개를 싣고 집을 나섰다. 달구지에 다섯 살짜리 동생과 엄마와 나 그리고 오빠와 언니가 타고 아저씨는 맨 앞에 앉아 소를 몰며 꽁꽁 언 길을 덜커덕거리며 갔다."
이렇게 떠난 피난살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혼란 중에 엄마는 남동생을 낳았다. 여동생을 데리고 빨래터에 갔다가 그만 여동생이 외나무 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떠내려 가고 말았다. 동생을 잃은 이 고통은 평생을 따라 다녔으리라. 동생의 무덤을 찾아가 과자랑 사탕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가 해가 뉘 엿 뉘였 해서야 돌아왔다. 이 아픔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작가가 글을 쓰지 않고서야 배길 수 있었을까.
꿈에 나타난 여동생을 보고 그 길로 엄마는 시장 통에서 어느 장사꾼을 만나 다시 피난길로 나섰다.
"한밤중에 여장을 한 그분을 따라 자고 있는 그 집 식구들의 깰세라 조심조심 안방을 빠져나왔다. 캄캄한 밤하늘엔 별들이 반짝였다.
그분은 여름철이라 밤이 짧으니 빨리 걸으라고 재촉했다. 넘어지더라도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도 했다. 엄마는 동생을 등에 업고 나는 아버지가 사주신 빨간 가죽 가방을 등에 졌다. 험한 길을 엎어지며 힘겹게 산을 넘고 들판에 엉덩방아를 찧어가며 한참을 걸었다. 아버지와 오빠 언니도 이랬겠구나 생각하면서 걷고 또 걸었다.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신통하계도 갓난아기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그분은 "삼팔선을 넘었으니 여기서부터는 남한."이라고 하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얼마 후 언덕을 내려오는데 총소리가 들려왔다. 길을 인도한 그분이 총에 맞은 것 같다고 엄마가 애석해하며 눈시울을적셨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열 살배기 어린 여자 아이가 겪은 이 시련은 작가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아픈 고통이 되었지만 삶의 담금질도 되었으리라.
이선재 수필을 읽으면 박완서의 소설이 떠오른다. 목가적인 고향 풍경이나 자식 공부를 위해 삼팔선을 넘었던 것을 담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많이 닮아 있다. 또한 박수근 화백과의 추억을 담은 <나목>이야기도 닮아있다. 그 시절 우리의 삶의 모습이었다.
이선재 수필에는 어린 시절 해주와 황해도 옹진 용호도에서의 추억이 그리움으로 남아, 지난한 세월이었지만 행복했던 추억으로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이선재의 추억에는 유난히 선생님의 이야기가 많다. 어려운 과정에서도 그는 밝고 맑은 심성으로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친구의 진로에 걸림돌이 될까 봐 대학지망을 바꾸기도한 그 착한 마음이 씨가 되어 대학 교수가 되어 우리나라 패션디자인을 이끌기도 했다. 젊잖고 중후한 신사 남편을 만나 평생을 내조하면서도 워킹맘의 원조로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내었다.
팔십을 훌쩍 넘은 지금도 조상의 제사를 고수하는 사람이 있을까 할 정도로 전통을 지키고 실천하는 현모양처였다. 어쩌다 저녁모임에 와서도 남편의 저녁을 차려주어야 한다고 귀가하는 애부가(愛夫家)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나는 이선재 회장님을 만난 것을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늘 옆에서 지켜보며 나도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소망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知에 너무 치우쳐도, 情에 너무 치우쳐도 안된다. 意志만이 이상을 낳는다지만 어찌 그렇게만 살 수 있을까.
어차피 인생이란 거친 세파에 허덕이며 왔다 가는 영원한 나그네인 것을 나는 <지붕 위의 초상화>를 읽으며 새삼 깨우친다.
지붕 위의 초상화에
겨울 햇빛이 가득하다.
(2025.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