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스를 뜨는 여인
최원돈
소설의 첫 문장이 흥미로운 것은 곧 펼쳐질 이야기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전시회도 마찬가지로 첫 작품은 좋은 이정표가 된다.
미국 메트로폴리탄전 '빛을 수집한 사람들' 특별전에선 '살바도르 달리'의 <레이스를 뜨는 여인>이 그렇다.
달리는 인상주의 화가는 아니다.
컬랙터 '로버트 리먼'이 달리에게 모사를 의뢰해 만든 작품이다. 달리는 17세기 바로크시대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아 모사한 그림이다.
1956년 2월 25일
살바도르 달리귀하
세인트레지스 호텔 5번가&55번가 뉴욕
친애하는 살바도르,
당신이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페르메이르(르메르) 이 작품 <레이스를 뜨는 여인>을 저를 위해 모사해 주시기로 한 약속을 확인하고자 이 편지를 씁니다. 합의된 대가는 미화 5,000 달러입니다. 이 작품은 당신이 완전히 고전적인 기법으로 제작하는 유일한 모사본이 될 것입니다. 또한 제가 이번 작품에 만족한다면, 당신은 같은 금액인 5,000달러를 받고 제가 원하는 또 다른 페르메이르(베르메르)의 작품을 모사해 주기로 하셨습니다. 제가 선택하는 작품은 미국에 소장된 페르메이르(베르메르)의 그림 중 하나일 것입니다.
현재 당신이 구상하고 있는 <레이스를 뜨는 여인>의 모사본을 저는 아주 간절히 원합니다. 그것을 구할 수 있다면 저에게 큰 기쁨이 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미술에, 특히 네덜란드 화파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도 매우 큰 가치를 지닐 것이라고 믿습니다.
며칠 전, 당신을 만나 이야기 나누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오는 3월 중순경 파리에 도착하시면 잠시라도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과 부인께 따뜻한 인사를 전하며
진심을 담아, 로버트 리먼
컬렉트인 리먼이 달리에게 의뢰한 덕에 태어난 작품인 이 작은 그림에는 예술적 사건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페르메이르를 향한 달리의 경외심은 컸다. 빛과 색의 조화와 정교함에서 그를 최고로 꼽았다. 달리는 "'레이스를 뜨는 여인'은 강렬한 미적인 힘을 가진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달리는 단순한 복제를 넘어 당대의 시각을 충실히 반영한 일종의 실험작을 완성했다. 달리의 모작에서 훨씬 감각적이고 역동적인 이유는 힘찬 붓놀림 때문은 아니었다.
잊힐 뻔했던 페르메이르는 19세기 안상주의 열풍으로 인해 재발견되었다. 인상주의는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느끼는 대로 그리고자 한 열망이었다. 빛을 상징이 아닌 사건으로 다룬 페르메이르는 당대 화가들의 문제의식을 수백 년 앞서 다룬 선구자였다. 그는 근대미술의 주요 담론으로 소환되고 수용되었다. 페르메이르의 작품 중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발굴되어 걸작으로 남을 수 있었다.
달리에게 페르메이르를 재해석하게 한 컬렉터가 없었다면 두 예술가의 시공을 뛰어넘는 만남이 가능했을까. 리먼에게 예술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대화의 창구였다.
"화가의 혁신과 컬렉터의 선구안, 그리고 시대적 흐름이 사심 없이 만날 때 새로운 미술사적 가치를 띈 걸작이 탄생하게 된다."
빛의 여정
"언뜻 보기에 이 그림은 레이스 뜨는 여인을 특유의 부드러운 빛과 색감으로 정교하게 묘사한 17세기 네덜란드의 신비로운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작품을 그린 화가는 초현실주의의 선구자 살바도르 달리로 미국의 수집가 로버트 리먼이 직접 달리에게 의뢰한 것입니다. 기이한 꿈의 세계를 표현했던 달리의 작품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달리는 왜 이 그림을 그렸으며, 리먼은 무슨 이유로 이 작품을 의뢰했을까요?"
"리먼 가문은 미술사에서 중요한 대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페르메이르는 그들이 수집하지 못한 화가 중하나였습니다. 리먼은 달리가 페르메이르 작품의 복제품이 걸린 집에서 자란 것을 알고 리먼 컬렉션의 빈자리를 채우고자 의뢰했습니다. 로버트 리먼은 아버지 필립 리먼과 함께 수집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 미국 수집가의 개성 있는 취향이 반영된 소장품에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까지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화가들이 만든 생동감 있고 다양한 예술 세계가 담겨 있습니다."
마국 메트로폴리탄전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전시회에 아내와 큰딸과 함께 갔다. 평일이라 국립중앙박물관은 한산했지만 전시장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난해부터 '이 전시는 꼭 보아야 한다'는 마음에서 지난주 혼자 여기 왔을 때는 남겨두었다. 아내와 큰딸과 함께 보기로 한 약속 때문이다.
안중에 사는 큰딸이 서울에 올라왔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큰딸은 언젠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 제일 처음 만난 그림이 <레이스를 뜨는 여인>이다.
'빛의 여정'을 읽었다. 아리송한 글을 이해하지는 못하고 '소품 같은 그림이 왜 맨 처음에 걸렸을까' 하고 그림을 찬찬히 보았다. 작은 그림이지만 색상이나 빛의 표현 등이 뛰어났다.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그림이었다. 이 그림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언가 사연이 있는듯했다. 이어서 한 통의 편지 글이 눈길을 끌었다.
'어떻게 모사한 그림이 이 큰 전시에서 첫 작품으로 내세웠을까.' 하는 의문이 남았다.
그런데 오늘 조간신문에 이 기사가 실렸다. 먼저 기사부터 읽었다. 그간의 의문들이 하나씩 풀려 나갔다. 이 그림의 원작을 그린 페르메이르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렸으며 달리가 모사한 '레이스를 뜨는 여인' 때문에 '진주 목걸이를 한 소녀'가 알려지게 되었다니 놀랍다.
화가들은 남의 그림을 모사를 잘하지는 않는다. 모사한 그림은 습작으로 취급하고 자신의 그림이라고 내세우지도 않는다. 하지만
살바도르 달리의 '레이스를 뜨는 여인'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으니 아이러니하다.
나는 은퇴 후 10년 동안 수채화를 취미 삼아 그리고 있다. 주로 습작으로 남의 그림을 많이 그려 보았다. 그러나 내 그림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달리가 페르메이르를 경외심으로 원작을 집요하게 연구하며, 단순 복제를 넘어 이 시대에 걸맞은 그림으로 재해석해 낼 수 있다면 달리의 그림처럼 될 수도 있지 않을까. (2026.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