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 국토,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

by 최원돈

아름다운 우리 국토,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

-금요일은 나 혼자 박물관에 간다-(3)

최원돈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장 중앙홀에 <대동여지도>가 걸렸다. 안내판은 다음과 같다.


"김정호 (1804?~1866?)

조선, 1861년(철종 12),

종이에 목판 인쇄 후 채색

30.5 cmX20.0 cm(1 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신수 19997)의

복제(실물 크기의 95%)"


"<대동여지도>는 1861년(철중 12) 김정호(1804?-1866?)가 목판으로 인쇄하고 채색하여 만든 전국지도입니다. 김정호는 우리나라를 22층으로 나누어 각 층의 지도를 1권의 첩으로 만들었습니다. 각 첩은 펴고 접을 수 있도록 제작하여 편리함을 더했습니다. 모두 펼쳐 연결하면 세로 약 6.7m, 가로 약 3.8m 크기의 대형 전국지도가 됩니다. <대동여지도)는 산줄기와 물줄기를 세밀하게 표현하였으며, 도로에는 10리(약 4m)마다 접을 찍어 지역 간 거리를 쉽게 계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행정과 군사, 지리 정보를 다양한 기호로 나타내어 지도의 내용을 쉽고 빠르게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대축적 지도의 발달과 함께 다양한 지도가 제작되었습니다.


김정호는 <청구도>와 <동여도지지> 등의 필사본 지도와 <대동지지>와 같은 지리지 편찬 경험을 바탕으로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여 조선 후기 지도 제작의 성과를 집대성하였습니다."


대동여지도를 보는 순간 가슴이 띈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동여지도를 실물 크기로 본사람은 드물것이다. 그것도 전체를 한눈으로 보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이번에 거의 실물크기의 대동여지도가 걸린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 상설전시장 중앙홀은 3층 높이의 건물이다. 이곳에 높이 6.7m 넓이 3.8m의 대동여지도가 걸렸다.


이렇게 방대한 지도를 한 개인이 만들었다니 정말 놀랍다. 그것도 일일이 직접 답사하여 그렸다니 선 듯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당시엔 변변한 측량장비가 있을 수 없을 것이며 설령 있다 해도 개인이 소지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나라의 지도 제작은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더욱이 국가의 제일가는 기밀이 아니었을까. 그는 무엇 때문에 이 일에 평생을 바쳤을까. 그리고 무엇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또 가족은 어떻게 먹여 살렸을까. 말로만 듣던 대동여지도를 만날 수 있는 기쁨과 함께 의구심으로 가득했다.


고산자 김정호,​ 그는 누 구안가


"김정호는 자신의 호를 ‘고산자(古山子)’라 하였다. 본디 공교한 재주가 많았고, 특히 여지학(輿地學, 즉 지리학)에 깊이 열중하였다. 그는 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地球圖)’를 제작하고 또 ‘대동여지도’를 손수 판각하여 세상에 반포했다. 세상에 그 정밀하고 상세한 것은 고금에 그 짝을 찾을 수 없다. 내가 한 질을 구해 보았더니 진실로 보배로 삼을 만한 것이었다. ‘동국여지고(東國輿地攷)’ 10권을 편집했는데 탈고하기 전에 죽었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


네이버 나무위키에 실린 글이다. 여기에

KBS 역사스페셜 다큐멘터리도 있다.


김정호의 꿈은 한 장의 지도로 만들어졌다.

그의 꿈은 '조선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라'였다.


그는 한 장의 지도를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의 신분은 중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을 인정한 관료와 양반 벗의 도움으로 이일을 해냈다. 그의 가족이나 자신의 기록은 자신이 만든 저술 어디에도 없다. 오직 그의 관심은 대동여지도의 완성뿐이었다. 그는 평생을 풍찬노숙하며 답사를 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꿈꾼 조선의 네트워크의 결실은 얻지 못했다. 그의 생몰 가록은 어디에도 없다. 하물며 가족관계는 물론 그의 생애도 확실하지는 않다.



"일찍이 제 나라 강토를 깊이깊이 사랑한 나머지, 그것의 시작 과 끝, 그것의 지난날과 앞날, 그것의 형상과 효용, 그것의 요긴한 곳과 위태로운 곳을 그리는 데 오로지 생애를 바쳐 마침내 그 모든 걸 품어안은 이가 있었던바, 그가 바로 고산자라 했다. 평생 산을 그리워했으되 그 산 중에서도 옛산을 닮고, 옛산에 기대어 살고 싶은 꿈이 있어 스스로 고산자古山子라 불렀다고 했다."


박범신의 장편 소설 '고산자'는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한 재 구성로 작가의 열정과 상상력에 의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정호의 딸 '순실이'는 역사적 사실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것일까.


이 책에서 '양보경 성신대지리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후기의 지도 발달의 성괴를 바탕으로 조선지도학의 대미를 장식한 지도 제작자가 고산자 김정호이다. 그러나 김정호는 1804년에 태어나 1866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정확한 생존 시기나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인물이다. 단지 그가 남긴 방대한 지도와 지리지만이 그의 위대함을 입증하고 있다."

"고종대에 총융사,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870년 (고종13) 판중추부사로서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우리측 대표였던 신 헌申櫶은 그의 문집 '금당초고'의 '대동방역도서' 에서 자신이 지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비변사나 규장각 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와 민간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를 서로 대조하고 여러 지리지 등을 참고하여 완벽한 지도를 만들려고 노 럭하였으며, 이 일을 김정호에게 위촉하여 완성하였다고 하였 다. "


박범신은 이 소설을 끝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늘 궁금했다. 고산자 김정호는 누구일까.


그는 소문대로 백두산을 아홉 번 열 번 오르고 너무도 상세히 지도를 그린 나머지 첩자로 몰려 끝내 옥사했다는 게 사실일까. 그에게도 처자식이 있었을까. 한 인간으로서 사랑을 혹시 해본 일은 있었을까. 지도에 미친 그는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어떻게 먹고살았을까. 그는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고 언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을까.


그리고, 불과 백수십 년 전의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울러 그가 그려낸 '대동여지도'는 조선조에서 생산된 이른바 최고의 베베트셀러'인 셈인데, 어찌하여 역사는 그것의 작가였던 그에 대해 고향은 물론, 출생과 죽음, 심지어 본관조차 기록해 놓지 안 았을까. 무슨 연유로 그에 대해 완강하게 침묵해왔을까.


다만 이 소설을 쓰면서,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했고, 그래서 세상과 계속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뼈저리게 지켜온 강토에서, 나와 우리가 지금 계속 이어 살고 있다는 큰 위로와 자긍심을 새삼 확인할 수 있어 행복했었다는 사실은 밝혀두고 싶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은 누구보다 먼저 나를 깊어지도록 만들었다.

드높고高山子, 외롭고孤山子, 옛산에의 꿈을 잃지 않았던 古山子....


이로써, 오랫동안 깨어 있을 때나 꿈에서나 나의 가장 깊은 중심에 눈물겹게 모셔져 있던 고산자 선생을 떠나보내고자 한다. "



"대동여지도는 목판으로서의 아름다움 과 선명함, 정교함과 품격을 갖춘 지도이다. 정밀한 도로와 하천, 정돈된 글씨와 기호 들, 살아 움직이는 듯한 힘찬 산줄기의 조화와 명료함은 다른 어느 지도도 따를 수 없는 판화로서의 아 름다음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고산자 김정호는 위대한 지 도학자이면서 훌륭한 전각가였다고 할 수 있다." (양보경 성신대지리학과 교수)


나는 대동여지도를 좀더 자세히 살펴 보기 위해 '한글 대동여지도' 한 권을 샀다. 책을 펼치며 그 아름다움과 정교함에 깊게 매료되었다. '어떻게 이런 과학적인 지도를 만들었을까'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나의 강촌집 마을을 찾아보았다. 춘천편 지도에는 방곡芳谷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방곡리는 개성왕 씨 집성촌이었다. 나는 개성왕 씨 종중 산이 있는 봉화산 아래에 살고 있다. 이 산 정상에는 봉화대 흔적이 있다.


고산자 선생의 체취라도 낄 수 있을지 이번 설에는 한번 올라가 볼까한다. 시 고산자 어른이 봇짐을 메고 가는 모습을 만나지나 않까. (202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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