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2)

by 최원돈

겸재 정선(2)

아! 우리 강산이여!

-금요일은 나 혼자 국중박 간다-(7)

최원돈


겸재 정선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우리 산천의 참모습을 담아내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가 추구한 진경산수(眞景山水)란, 중국의 이상적인 산수를 모방하던 기존 화풍에서 벗어나, 조선의 자연을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을 뜻한다. 즉,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라 우리 땅의 숨결과 정서를 담아내려는 시도였다. 그의 그림에는 금강산이나 한양 주변의 풍경이 자주 등장하며, 생생하면서도 담백한 아름다움이 살아 있다.



금강내산전도 金剛內山全圖

겸재 정선 화첩 제1.2면 정선(1676-1759)

비단에 먹/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국립중앙박물관 기탁)


금강내산을 묘사한 장면이다. 화면은 왼쪽 흙산과 오른쪽 바위산으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오른쪽 아래에는 내금강 입구에 자리한 장안사와 그 앞 비홍교 등을 그려 넣었다, 나머지 공간은 서릿발처럼 날카롭게 솟은 바위산으로 채웠다. 화면 위쪽에는 홀로 솟아오른 비로봉 배치해 금강산의 장엄한 분위기를 한층 선명하게 드러낸다.



비로봉 毘盧峯

정신(1676-1759) 조신이 18세기

종이에 먹/2018년 손세기 손창근 기증


금강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비로봉을 묘사하였다. 해발 1,638m 금강산은 내금강과 외금강으로 나뉜다. 날카로운 바위들 사이로 거대하고 둥근 비로봉이 우뚝 솟아 있으며, 수직준과 난시준이 어우러진 거친 속도감 있는 필치가 비로봉의 장엄함을 한층 강조한다.



박연폭포

정선(1676-1759)

종이에 먹/개인소장


개성의 박연폭포를 그렸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박연폭포를 중국 여산 폭포에 비견할 만큼 뛰어난 명승으로 여겼다. 정선은 폭포의 장엄한 인상을 극대화하기 위해 대상을 과장해 표현하고, 폭포수는 실제보다 길게 확대하여 그렸다. 양쪽 벼랑은 짙은 먹으로 겹겹이 쌓아 흰 물줄기가 더욱 도드라지도록 했다. 화면 아래에는 법사정 곁에서 폭포를 감상하는 선비를 배치해 현장감을 더했다.


박연폭포는 개성 대흥 산성 밖에 있는 폭포이다. 폭포 아래에는 돌항아리처럼 생긴 연못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박 진사라는 인물이 이 연못 위에서 대금을 불자 그 소리에 감동한 용녀가 그를 물속으로 데려가 남편으로 삼았다고 하여 폭포의 이름이 "박연' 되었다고 한다.



"아래 연못은 들끓고 윗 연못은 조용한데

겹겹으로 가파른 절벽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네

힘센 나라에 천 년 동안 군사와 말이 내달리는 듯

위태로운 성곽의 한쪽에서 바람과 천둥이 다투는 듯

예로부터 여산의 경치에 필적하다 말해 왔는데

하늘이 베푼 삼 협의 풍경은 누가 논할 것인가

나라가 위급한 때 정녕 천 길 폭포 있으니

요새가 되어 서쪽 고을을 방비할 수 있으리"

-이병연(167-1751, 박연폭포


겸재 정선의 초년작인 <신묘년풍악도첩>과 노년의 역작인 <박연폭포> <비로봉> 등은 겸재의 그림이 더욱 완숙한 진경산수의 경지에 이른 큰 울림을 주고 있다.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은 오렌지기였다. 당시 겸재 정선은 화단을 주름잡던 뛰어난 화가였고 사천 이병연은 당대 최고의 시인 이었다. 두 사람은 그림과 시를 주고받으며 화첩을 엮었다.



조영석이 정선의 <구학첩>에 붙인 글

丘經帖跋

조영석(1686-1761)


<구학첩> 은 정선이 경상도 하양 현감으로 재직하던 시기에 영남 지역과 청풍, 제천, 단양, 영춘 등 네 지역의 풍광을 그린 화첩이다. 현재 3점의 그림과 관아재 조영석이 쓴 발문이 전한다. 정선의 예술적 동반자였던 조영석은 발문에서 조선 300년 이래의 대가로 조선의 산수화는 정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원백(정선)은 일찍이 백악산 아래 살면서 그림을 그릴 뜻이 서면 앞산을 마주하고 그렸다. 산의 주름을 그리고 먹을 구사함에 저절로 깨침이 있었다. 그리고 금강산을 두루 드나들고 영남을 편력하면서 여러 경승지에 올라가 유람하여 그 물과 산의 형태를 다 알았다. 또한 그가 작품에 얼마나 공력을 다했나 보면 다 쓴 붓을 땅에 묻으면 무덤이 될 정도였다. 이리하여 스스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하여 우리나라 산수 화가들이 한결같은 방식으로 그리는 병폐와 누습을 씻어버리니, 우리 동방의 산수화는 원백으로부터 비로소 새롭게 열렸다고 하겠다."



청휘각과 청풍계

장동팔경 7.8면


정동의 경치 가운데 청휘각과 청풍계를 그렸다. 칭휘각은 오늘날 인왕산 기슭 옥류동에 자리한다. 화면 중앙에는 청휘각을 두고, 주변에 다양한 나무를 배치해 공간을 이룬다. 청풍계는 인왕산 동족 기슭에 있는 곳으로, 경관이 뛰어나 17세기 초부터 문인 모임이 열리던 장소이다. 화면 중앙 큰 나무를 중심으로 청휘각, 태고정, 늠연사를 배치하고, 뒤편 둥근 절벽을 짙은 먹으로 처리해 깊이감을 더했다.



수성궁 옛터 壽城舊址

정선 (1676-1759)

종이에 먹/1981년 이흥근 기증


인왕산 기슭에 자리했던 수성궁(또는 자수궁) 옛터를 묘사하였다. 자수궁은 백운동천과 옥류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곳으로, 선왕의 후궁들이 모여 살던 공간이다. 화면에는 한양 성곽의 낮게 쌓은 담이 인왕산 능선을 따라 톱니처럼 이어지고 오른쪽 위에는 빗자루를 쓸어내리듯 먹을 반복적으로 칠한 인왕산 주봉 바위 일부가 드러난다. 눈앞에 보이는 장면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현장에서 본 광경과 이미 알고 있던 지리 정보를 함께 종합해 화면을 구성하였다.


겸재 정선, 그는 왜 평생 그림을 그렸으며 진경산수를 고집하였을까.


정선의 삶은 한마디로 “그림에 바친 생애”였다. 1676년에 태어나 비교적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아갔지만, 관직보다도 그림에 대한 열정이 더 컸다. 그는 전국을 유람하며 수많은 그림을 남겼으며 끊임없이 붓을 들었다. 그 열정이 얼마나 컸던지, 죽은 뒤에는 사용하던 붓을 모아 묻은 ‘붓 무덤’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등이 있으며, 이 작품들은 자연의 실제 모습과 더불어 화가의 내면까지 함께 담아낸 걸작으로 평가된다. 정선의 진경산수는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우리 땅을 우리 눈으로 보고, 우리 마음으로 표현하려는 예술적 자각”이었다. 그의 일생은 그 자각을 끝까지 실천한 한 예술가의 외로운 길이었다.



정선의 진경산수는 그림이자 시와 같다. 그의 그림에는 시가 있고 문장이 있다. 나는 겸재의 진경산수를 통하여 글쓰기를 위해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는 ‘그림이자 시’이다. 그의 그림에서 배울 수 있는 글쓰기는 기교보다 더 깊은 태도에 있을 것이다.


첫째, ‘있는 그대로 보되, 그냥 옮기지 않는다’라는 태도이다.

정선은 실제 풍경을 그렸지만, 단순한 기록에 머물지 않았다.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자신의 감정과 시선을 스며들게 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풍경을 묘사할 때 사실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 장면이 내 안에서 어떻게 울리는지를 함께 써야 한다. 진경산수는 ‘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느끼는 것’으로 나아가는 법을 가르쳐 준다.


둘째, 여백의 힘을 배우는 자세이다.

정선의 그림에는 비어 있는 공간이 많다. 그러나 그 여백은 공허가 아니라 숨결이다. 독자가 머물고 상상할 자리를 남겨 둔 것이다. 글에서도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말고, 남겨 두는 문장, 멈추는 문장을 익혀야 한다. 때로는 한 줄의 침묵이 긴 설명보다 더 깊이 스며든다.


셋째, 대상을 향한 애정과 관찰의 자세이다.

그는 금강산을 수없이 그리며 매번 다른 표정을 발견했다. 이는 단순한 재능이 아니라 반복된 응시에서 나온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도 한 대상을 오래 바라보는 힘이 필요하다. 익숙한 것에서 낯섦을 발견하는 눈, 그것이 문장을 새롭게 만든다.


넷째, 간결함 속의 밀도이다.

정선의 선은 거칠어 보이지만 군더더기가 없다. 필요한 것만 남겨 가장 본질적인 형상을 드러낸다. 글 역시 화려한 수식보다 정확한 한 문장이 더 오래 남는다. 덜어낼수록 의미는 또렷해진다.


마지막으로, 나만의 시선이다.

그는 중국식 실경 산수를 따르지 않고 조선의 산천을 그렸다. 이것은 단순한 소재 선택이 아니라, 자기 세계를 믿는 태도였다. 글쓰기에서도 남의 문장을 닮으려 하기보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세계를 쓰는 용기가 중요하다.


결국 정선의 진경산수가 가르쳐 주는 것은 글쓰기는 기술이 아니라 방향이 아닐까.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보다,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낄 것인가”를 먼저 묻는 것이다. 이 질문을 붙들고 있다면, 나의 문장도 어느 순간 겸재의 진경산수처럼, 문장으로 조용히 나타날 것이다. (202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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