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글씨와 그림에 담긴 마음
-금요일엔 나 혼자 국중박 간다-(8)
최원돈
글씨와 그림에 담긴 마음
서화는 글씨와 그림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예로부터 '서화동원書畵同原'이라 하여 글씨와 그림의 근원이 같다고 하였다. 글씨와 그림에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자연스레 담기기 마련이다. 글씨에는 인격이 묻어나고 그림에는 사물과 자연에 대한 뜻이 담겨 있어 시와 같다고 여겼다.
서화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서로의 생각을 전달하고, 감정을 공유하며 시대의 가치와 염원을 담아냈다.
글씨의 아름다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예로부터 글씨를 아끼고 감상해 왔다. 글씨에는 굵고 가는 획의 변화와 붓의 흐름과 멈춤이 드러나며, 글씨를 쓰는 속도와 호흡 또한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러한 붓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바라보는 이는 글씨를 쓴 사람의 몸짓과 마음의 흐름을 자연스레 느끼게 된다. 글자 하나의 모양뿐만 아니라 글자 사이의 간격과 글씨의 구성, 멱과 여백이 이루는 관계에서 질서와 변화를 살필 수 있다.
글씨를 쓰는 사람
예로부터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 하여 글씨는 그 사람 됨과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글씨를 쓰고 익히는 일은 문인이나 학자에게 학문과 인격을 닦는 과정이었다. 이들 가운데 타고난 자질과 오랜 수련을 거쳐 빼어난 경지를 이룬 명필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의 김생金生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의 탄연坦然, 조선시대의 안평대군安平大君과 한호 韓濩 김정희金正喜 등 시대마다 많은 명필이 나왔다. 조선시대에는 왕들도 글씨를 많이 남겼다. 왕이 친히 쓴 글씨는 어필御筆이라 하는데 보배롭게 여겨지고 소중하게 간직하었다.
글씨의 다양한 모습
글씨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내며, 그 내용과 쓰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음에 드는 한 편의 시나 글귀를 옮겨 쓰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기억하거나 다른 이에게 전달하기 위해 쓰기도 한다. 두루마리와 첩, 족자와 병풍에 쓰인 글씨처럼 감상을 위한 글씨가 있는가 하면, 일기나 편지에 쓰인 일상의 기록과 소통을 위한 글씨도 있다. 이처럼 글씨는 읽고 쓰기 위한 실용적 목적과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예술성을 동시에 추구하며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모습으로 발전해 왔다.
윤순이 쓴 주희의 시
尹淳筆朱熹詩
윤순尹淳(1680-1741)
조선 18세기 전반
비단에 먹
백하白下 윤순은 18세기 숙종 영조 대의 문신이자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명필이다. 이 작품은 중국 남송의 학자 주희(1130-1200)의 시 <이소를 묻는 양정수에게 답하다>를 유연하면서도 날렵한 느낌의 행서와 초서로 쓴 것이다. 윤순은 중국 당 송대 명필의 글씨를 폭넓게 연구하였고, 특히 북송의 서화가 미불(1051-1107)의 글씨를 깊이 소화하여 조선후기 문인들의 글씨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옛 <이소>*를 읽고 밤에는 뱃전을 두드릴 때
강과 호수는 땅에 가득하고 강물은 하늘에 떠 있는 듯하네
지금 차가운 창 아래서 코 막고서 읊조리니
모래사장에 비친 달빛이 배 안을 환하게 비추네
*이소 : 중국 초나라 굴원(기원전 343년경~273년경)이 지은 장편 시
이광사가 쓴 육유의 시
李匡師筆陸游詩
이광사 (1705-1777)
조선 18세기 후반 I 종이에 먹
원교圓嶠 이광사는 백하 윤순의 글씨를 계승하면서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한 문인 서화가이다. 남송의 시인 육유 (1125-1210)의 시 <산록>을 큰 글씨의 행서로 쓴 이 작품은 빠른 붓의 움직임 속에 응축된 필획의 힘과 생동감이 잘 드러난다. 그는 왕희지로 대표되는 위진시대의 소박하고 고아한 글씨를 깊이 탐구하며 구불거리고 꺾이는 필획의 멋을 살린 '원교체'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그의 글씨는 여러 명필들이 개성적인 글씨를 선보였던 조선 후기 서예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풀이 우거져 길은 실처럼 좁은데
우연히 나무꾼을 따라간다네
숲 사이 너럭바위를 만나
잠시 쉬면서 봄 농사일 구경 한다네
정조의 시
영변부사의 부임 행차에 주다
만길 높이 우뚝 솟은 철옹성
높이 열린 성문은 영변부사 가는 길
강동은 멀지 않고 성천은 가까우니
익숙한 길 경쾌하게 부임하는 길 전송하노라
기미년(1799) 늦은 여름 己未季夏之月
정조의 글 (상단)
철옹부백(연변부사)에게 보내다.
도성에 있을 때에 비록 자주 만나지는 못하었지만,
그대가 성문을 나가자 이내 마음이 다시 침울해진다.
평안도로 가게 된 일은 그대에게는 하양의 죽부와
다를 것이 없으니, 사람들이 그대를 떠들썩하게 환영할 것이다.
이 읍은 관방의 지역이라 무예를 중시하는 정사가
문풍을 떨치는 것보다 배나 더 중요하다.
폐단을 제거하는 근본은 만고에 있고, 다름을 종식시키고
풍속을 안정시키는 방도는 향안에 있다.
성안에 비축해 둔 군량미를 탐하는 일로 말하면, 쌀값이 높아지면
수령이 반드시 이 곡식을 파니, 그대는 이 한 가지 일에 있어
획일의 법을 쓰는 것이 또한 좋겠다.
허다한 사안들은 우선 내버려 두고 논하지 않겠으나,
모든 것은 '율기' 두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대의 부임길에 시를 지어 보내고 겸하여 몇 가지 물품을 부친다.
잘 부임하고 전승하기만을 바란다.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김정희(1786-1856)
조선 18세기 I 종이에 먹
2018년 손세기∙손창근 기증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소후를 위해 쓰다. 삼십육구 주인
잔서완석은 오랜 세월 동안 깨지고 부서진 비석돌, 그 돌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몇 개의 글자를 뜻한다.
예서와 전서를 기반으로 각 서체를 섞은 김정희의 글씨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모된 비석 글자를 떠올리게 한다.
볼품없이 마모된 빗돌 위에 남은 문자의 의미는 금석문 연구를 통해 옛 글씨를 깊이 익히려는 그의 태도를 상징한다.
'잔서완석루'는 금석문을 공부하는 문인의 집에 걸렸을 법한 글씨로, 소후가 호인 제자 유상(1821~?)에게 금석문과 글씨 연구에 더욱 정진하라는 뜻을 담아 써 준 것으로 추정된다.
안평대군이 엮은 고대 명필 모음집 비해당집고첩 匪懈堂集古帖
편찬 안평대군 이용(1418-1453)
글씨 김생(711-790 이후) 등
조선 1443년 이후 간행 I 종이에 석판
비해당 안평대군 이용이 중국 역대 제왕과 왕희지, 조맹부 등 중국 명현의 필적, 그리고 통일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를 모아 엮은 첩이다.
안평대군은 초서로 쓴 발문을 장인에게 맡겨 돌에 새기게 하여 사람들이 본받아 익힐 수 있도록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첩에 수록된 중국 글씨들은 1416년 명나라 황자 주유돈(1379~1439)이 편찬한 <동서당집고법첩>을 참고하여 수록한 것이며, 안평대군 역시 이 법첩을 소장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안평대군은 1450년(문종 즉위년) 11월 <비해당집고첩>의 판본을 진상하였고,
이 판본은 안평대군 사후에도 세조 대까지 사용되어 글씨 학습의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
왕휘지(338~386)는 남의 빈 집에 잠시 지낸 적이 있었는데 즉시 대나무를 심도록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잠시 거주하는데 어찌 번거롭게 합니까?" 라고 하자. 왕휘지는 곧장 대나무를 가리키며
"어찌 하루라도 이 친구(대나무)가 없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세설신어 권 23 입탄 )
왕유는 동산에 있을 때 소탈하게 아무 일 없는 듯이 지냈으며 항상 마음으로 만족하였다.
왕희지(303~361)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애당초 영예와 치욕에 흔들리지 않았다. 설사 옛날의 은일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이 사람을 뛰어넘겠는가 “ 라고 하였다(세설신어 권 18 서일)
왕돈(266-324)이 술 취한 후에는
"늙은 천리마는 마구간에 있지만 뜻은 천 리를 달리는 데 있고, 열혈 대장부가 나이는 들었으나 장대한 마음은 끝이 없다 “라는 글을 읊으면서, 여의봉으로 타호(침 뱉는 항아리)를 두드렸는데 타호 입구 부분이 모두 깨졌다.(세실 신어 권 13 호상)
곽박(276~324)의 시에 "흔들리지 않는 나무 없고, 흐르지 않는 냇물 없다"라고 하였다.
진의 대신 환부가 말하기를 "깊은 못과 높은 산과 같은 대단한 표현이라서 실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다.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심신이 아득해짐을 느낀다 “라고 하였다.
(세실 신어 권 4 문학)
(오른쪽면)
나는 일찍이 세상 사람들이 고인의 서법을 알지 못함을 격정 하여, 역대 제왕과 명현의 글씨를 모아 하나의 첩을 만들고 솜씨 좋은 사람을 시켜 돌에 새기게 하니, 사람들마다 모범을 삼을 수 있기를 바란다.
정통 8년(1443) 9월 무진일에 비해당에서 쓰다
(왼쪽 면)
계곡 아래에 울창하게 소나무 서 있고 산꼭대기엔 줄지어 묘목이 자라는데
직경 한 치에 불과한 저 묘목이 백 척의 소나무 가지에 그늘을 드리우네
대대로 귀족은 높은 지위 차지하고
영걸 준걸은 낮은 지위에 침체되었도다.
진나라 좌사의 <영사>에 나오는 일부 구절로,
무능한 귀족이 현인들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군림하는 세태를 풍자한 내용이다.
<이영서의 서문>
비해당 이용이 하루는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언젠가 <동서 단고 첩>에서 송나라 영장의 팔경시를 보고 그 글씨를 보물처럼 여겼다, 그리고 그 경치에 대해서 생각하고 마침내 그 시를 모사하라는 명을 내리고 그 경치를 그리게 하여 그 두루마리를
<팔경시>라 하였다. 그리고 고려에서 시로 뛰어난 진화 이인로의 시를 붙였다. 또 당 시대에 시로 뛰어난 사람에게 오언•육언∙칠언의 시를 지어주기를 요청하였다.
승려인 우천봉 또한 시를 지었는데 천봉은 대개 시로서 불교계에 이름이 난 사람이다. 그대에게 전말을 기록하기를 부탁한다"라고 하였다.
나는 문장이 보잘것없지만 오랫동안 인정을 받았고 또한 부탁을 받았는지라 글을 못 짓는다고 하여 사양할 수 없었다. 내가 보건대 귀공자 치고 화려한 모임에서 누를 끼치지 않는 자 드물었고, 또 연회에서 실수를 하지 않는 자가 드물었다. 또 선비를 좋아하고 역사를 좋아하고 세상의 생각 밖에서 노는 이런 사람은 천년이라도 찾기가 어려웠다.
비해당 이용은 영명한 자질에 부귀하신 몸이라 문예에서 놀 수 있음에도 돈독하게 좋아하는 사람은 평범한 포의의 선비이다.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면 그의 시는 당시唐詩를 얻었고, 그의 글은 진대晉代의 자취를 얻었고, 그의 화법은, 또한 그 묘를 지극히 하니 비록 삼절이라고 칭하던 자에게도 어찌 양보를 할 것인가? 또 생각을 불러일으키어 이 권(팔경시)을 만들어서 환상의 자료로 삼고자 한 것이다. 내가 생각건대 한가한 여가에 그림으로 홍취를 붙이고 시로써 그 뜻을 보며
(다음 쪽) 아득히 호수와 바다의 경치를 거두어서 수 폭의 비단 속에 갔다 두고 가슴 깊이 즐긴다면 이것이 진실로 진대의 귀공자들도 누리지 못한 것이요, 화려한 연회장에서 피해와 손실을 입히는 자들과 비교해 보아도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속된 기운을 벗어난 깨끗한 기상은 진실로 언어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상팔경의 아름다운 경치에 대해서는 이미 옛사람이나. 요즘 사람들의 글에서 극진히 표현하였다. 내가 다시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겠는가? 다만 소상팔경 시권의 끝에다 내 이름이나 걸어두고 영원히 전해진다면 다행이라 하겠으니 기쁘게 이 글을 쓴다.
임술년(1442) 가을 선교랑 집현전 부수찬 지제교 경연사경
노산 이영서 석류 삼가씀,
김정희가 오랜 벗에게 써 준 글씨
묵소거사자찬 默笑居士自讚
김정희(1786-1856)
조선 19세기/ 종이에 먹
추사 김정희가 오랜 벗이었던 황산 김유근(1785-1840)을 위해 써 준 글씨이다. '묵소거사'는 말해야 할 때에는 침묵을 지키고, 웃어야 할 때에는 웃는다는 뜻으로 김유근의 호이다. 김유근이 이 호의 의미를 담아 글을 짓고, 김정희는 이 글을 붉은 바탕의 냉금지에 정중하고 단정한 해서로 써 내려갔다. 줄을 긋고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글씨는 부드러움 속에 단단한 힘이 느껴진다. 말 대신 침묵과 웃음으로 삶을 견딘다는 글의 내용은 1837년부터 실어증으로 고통받았던 김유근의 처지와 깊이 맞닿아 있다.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한다면 시중時中(그때의 사정에 따라 적절하게 처신하는 일)에 가깝고, 웃어야 할 때 웃는다면 중용中庸(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똑 바름)에 가깝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가 온다거나. 세상에서 벼슬하거나 아니면 은거를 결심할 시기가 온다. 이러한 경우 행동할 때는 천리를 위반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는 인정을 거스르지 않는다. 침묵할 때 침묵을 지키고, 웃을 때 웃는다는 의미는 대단하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나의 뜻을 알릴 수 있으니 침묵을 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라! 중용의 도를 터득하여 감정을 발산하는데 웃는다 한들 무슨 걱정이 돼라! 휩쓸지어다.
나 자신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화는 면할 수 있음을 알겠다.
묵소거사가 자신을 찬한다.
當默而默, 近平時, 笑而笑, 近乎中. 周旋可否之間, 屈伸渭晨之際, 動而不悼於天理, 靜而不拂乎人情。默笑之義, 大矣哉, 불言而喩, 何患乎默, 得中而發, 何患乎笑。勉之說, 吾惟自況, 而知其免夫矣.
默笑居士自讚.
정약용이 <석옥시첩>에 붙인 글
題草衣海所藏石屋詩帖
정약용(1762-1836)
의순(1786~1866)
종이에 먹 紙本墨書
정약용이 초의 의순이 소장한 <석옥시첩>에 해설을 붙이고 쓴 작품이다. 맑고 고요하게 산속에 은거하는 삶의 가치와 정약용과 초의가 공유했던 선종사상이 잘 드러난다.
정약용은 시첩에 대해 해설을 쓰고 이어서 원나라 승려인 석옥 청공(1272-1352)의 시 <산거 한영> 옮겨 썼다. 그 뒤로 정약용과 초의가 이를 차운해 지은 시가 나란히 한 수씩 적혀있다. 정약용이 세상을 떠난 후 1843년 초의의 친구였던 위당 신관호(1810~1884)가 시첩에 죽석도와 분란도를 추가하였다.
초의 의순이 소장한 석옥시첩에 쓰다.
우리나라 선종의 계보는 여러 차례 이어졌다가 여러 차례 끊어졌다. 고려 말에 태고 보우 선사가 몸소 중국에 들어가 석옥 청공으로부터 법을 얻었는데 성공은 남종 입제의 후예이다. 태고로부터 일곱 번 전해져 부용 영관에 이르렸고, 두 후계자가 있으니 한 분이 청허이고, 한 분이 부휴이다. 천 가지만 갈래로 퍼져 무성하게 숲이 우거져. 드디어 우리나라에 가득 차게 되었으니, 태고 보우는 우리나라 선종의 큰 조상이다. <예기>에 이르기를 '그 선조가 나은 곳에 체제를 지낸다'라고 하였으니 그 근본이 있음을 귀하게 여긴 것이다. 비록 높고 낮은 등급이 다르고,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이 다르지만 석옥 청공이 법에 있어서 체제를 받아 마땅하다. 그 이치가 그러한 것이니. 가령 주나라 사람이 다만 후직을 높일 줄만 알고 제곡에 보답할 줄을 모른다면, 어찌 옳다 하겠는가. 그러나 석옥의 자취는 오래될수록 사라져 전하는 자가 많지 않다.
장주의 고사립이 석옥의 시 33수를 뽑고 난 뒤에 우리나라에 전해지게 되었는데, 그중에 <산거한영>으로 율시 12수, 단구 12수가 더욱 맑고 뛰어나 세속을 초월하였다 대체로 그의 시는 조탁을 일삼거나 협운을 자랑하지 않았고, 모두 마음속에서 근원 하여 편안스레 스 스로 터득한 것이어서 온화하고 담박한 심정이 시로 드러났으므로 자연스럽게 기뻐할 만하였다. 위로는 한산비과 습득과 나란히 달릴 만하였고, 아래로는 갑산과 자백의 앞에 놓일 만하였으니. 참으로 사람들이 모법으로 삼을 만하였다.
"내가 지금 산중에 거처한 지 10여 년이다. 거처와 음식, 어울리며 담소하는 것이 천연스레 하나의 禪老와 같은데, 다른 것으로는 한 줌의 상투, 九經의 공부가 차이가 날 뿐이다. 그리하여 기쁜 마음으로 청공의 시편을 따라 뒤미쳐 화담 시를 지어 나의 그윽한 회포를 폈다. 대략 사계절에 따라 나누어 짓기를 옛사람들이 산중의 사계절에 따라 시를 짓던 것처럼 하였다. 비록 속세와 불교가 아주 다르지만 스스로 마음을 읊은 점에서는 동일하다
우리나라에서 선을 강론한 것은 호남에서 성행하였다. 옛날 연담 유일이 불교계의 맹주가 되어 사대부 사이에 명성을 떨쳤다. 그 뒤로 운담 정일이 있었고. 또 그 뒤에 아암 혜장이 있었다. 연담 유일공은 내가 소짓적에 어울려 지냈으므로 나와 선친의 시가 그의 시집 속에 수록되어 있어 잊을 수가 없다. 정일공은 내가 그를 위해 시집을 교정하였고 또 서문을 지었으니, 또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혜장공은 일찍이 나와 더불어 <주역>을 강른한 적이 있다.
수십 년 이래 선∙교의 가르침이 더욱 세퇴하여 목탁소리가 적막하게 끊어졌다. 오직 정일의 승도 중에 대운 성흥이 있고, 혜장의 후계자로 철경 응원이 있으며 일공(연담 유일)의 법손으로 초의 의순이 있어서 문식이 약간 뛰어나 배우는 자들이 모여들었다. 드디어 이 세 사랑으로 하여금 나의 뒤를 이어 석옥의 시에 화답 시를 짓게 하고, 이윽고 기록하여 두루마리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석옥시권>이다. 이 두루마리를 관람하는 자는 의당 그 전말을 알아야 하므로 드디어 이렇게 서술한다.
-때는 가경 무인년(1818, 순조 18) 3월-8일.
자하산초 정약용이 쓰다”
"나의 집은 삽계의 서쪽에 있어.
물은 서천호에 가득하고 달은 시내에 가득했네
미처 이르기 전엔 산세가 험준하여 놀라더니
이른 뒤에야 바야흐로 집이 높고 낮음을 아네
달팽이가 오른 흰 벽엔 마른 껍질이 붙어 있고
호 랑이가 받고 지나가자 자국이 진흙에 찍혀 있네
한가로이 사립문을 닫아 봄 대낮이 적막한데
푸른 오동 꽃이 피자 화려한 산호새가 우네, <석옥 >
대나무 누각 스산하니 백련사의 서쪽이리
글씨 향기와 먹빛이 찬 시내에 잠겨 있네
산비탈 지세 급하여 좋은 뜨락을 열었고
바닷바람 세차서 지붕을 나직하게 엮었네
정원에 돌구유 놓아서 땅속 물을 들어오고
섬돌에 나막신 두어 봄 진흙탕에 대비하네
한 해의 성쇠는 시절의 경물을 따르니
잠시 뒤면 꽃이 흐드러지고 은갓 새가 지저귀리. <다산>
지팡이 하나로 오호의 서쪽을 모두 유람하고
신발 끌고 아주 돌아와 푸른 시내에 은거했네.
버들 그림자는 봄에 절집을 이둑하게 감싸고
꽃 그들은 저물 별 석 루에 나직하게 드리웠네.
쳐진 처마 기우려고 서리 맞은 풀을 모으고 ,
깨진 아궁이 고치려 눈 녹은 진흙을 뒤집네
유마힐처럼 입을 신중히 늘리기 허락했으니,
늘 학 울음소리와 꾀꼬리 울음이나 들으리.. <의순>
사립문은 세있으나 담은 적이 없어
새들이 오가는 모습을 한가로이 바라보네
큰 벽욱도 천 길의 돌에서 쉽게 구하지만
황금으로는 일생의 한가로움 사기 어립네
눈 녹자 새벽 산에서 찬 폭포 소리 들려오고
잎 지자 가을 숲엔 먼 산이 눈에 보이네
묵은 잣나무에 안개 흩어져 대낮이 긴데
시시비비는 흰 구름 사이에 이르지 못하네 <석옥>
꿈인지 생시인지 떠나고 머물음이 아득하니
고향이 있더라도 들아가기 구하지 않네.
세상 일 많이 겪어 두 눈은 휘둥그레하고
글 짓기도 그만 두니 이내 몸이 한가롭네.
골이 깊으니 하늘까지 솟은 나무 사랑스럽고
땅이 습하니 눈 덮인 산을 기쁘게 바라보네.
이미 봄 소리 들려 섣달 술을 맛보았는데
흰 갈매기는 푸른 파도 사이로 날아 내리네. <다산>
절집 부엌과 솔밭 오솔길이 빗장 없이 고요하여
목마른 사슴과 주린 노루가 자유롭게 오고 가네.
뜻을 얻었다고 어찌 세상에 쓰이기만 생각하랴.
마음을 다잡고 다만 산구름을 벗하여 한가롭고 싶네.
산 앵두가 입을 펼쳐 붉은 해를 가리우고
넷 가 대나무 가지 쳐서 푸른 산을 드러내네.
한 자락 맑은 생각 누구와 함께 논할까
흰 구름 사이로 올 사람 아무도 없도다 <의순>
사는 곳이 외져 저절로 세상과 단절되니
이끼 두렵고 숲이 깊어 풀나무가 향기릅네.
산의 빛깔은 비가 오건 가벼운 놀 반갑게 보고
저자의 소리는 아침저녁으로 드물게들려오네,
차를 달이려 질화덕에 누런 낙엽을 사르고
가사를 기울여 바위틈에서 흰 구름을 자르네.
사람이 장수혜도 백 년을 채우기 드물거늘
명리를 좇아 어찌 괴로이 앞다퉈 달리는가. <석옥>"
왕마힐은 누런 화분에 난초를 길렀으니
지금 초의 선사께 올릴 만합니다.
초서로 쓴 무이구곡가
武夷九曲歌
윤순(1596-1668)
조선 17세기 I 종이에 먹 (병풍)
중국 남송의 학자 주희(1130-1200)가 지은 무이구곡가는 무이산 아홉 굽이 계곡을 무릉도원의 이상향에 비유한 시로, 조선시대에는 글씨와 그림의 소재로도 널리 애호되었다. 17세기 초서의 대가로 유명했던 동토 윤순의 글씨는 빠르고 자유로운 붓의 움직임과 거친 필획의 질감이 잘 드러나며 큰 글씨의 짜임새 있는 구성도 돋보인다. 윤순은 16세기 초서의 명필인 황기로와 양사언을 계승하면서 활달하고 안정감 있는 초서를 선보여 18세기 이후 글씨에 큰 영향을 주었다.
태자사 낭공대사비
太子寺朗空大師陣
고려 954년 보물
통일신라의 선승이자 국사였던 낭공대사 행적 (832-916)을 기리는 비석으로, 고려 광종 5년(954)에 세워졌다. 비석의 앞면에는 낭공대사의 일생과 업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승려 순백이 남긴 후기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최치원의 동생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최인연이 지었고 글씨는 낭공대사의 제자인 승려 단목이 신라 제일의 명필로 꼽히는 김생의 여러 글씨를 모아 집자하여 새긴 것이다. 김생은 '해동의 서성'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명필로 인정받았다. 비석의 글자는 각 획마다 힘과 생동감이 살아 있어 김생의 글씨를 깊이 이해하고 새긴 승려 단목의 뛰어난 안목과 정성을 엿볼 수 있다 비석은 원래 경상북도 봉화 지역 태자사에 있었으나, 절이 사라진 뒤 자취를 감추었다가 조선 중종 4년(1509)에 영천군수 이항(1474-1533)에 의해 영천의 관아로 옮겨졌다. 이 사실이 비석 측면에 조선 전기 문신 박눌차(1448-1528)의 글씨로 기록되어 있다.
글 최인연(868-944)
글씨 김생(711-?) 행서 집자
국립중앙박물관 서화관이 문을 열었다. 6개월간 긴 겨울 잠을 깨고 2월27일 재개관했다. 나는 3월3일 서화관을 찾았다.
이번 전시는 <글씨와 그림에 담긴 마음>이다. 상설전시관 서화관 1관에서는 서예작품을 위주로 '서예가의 창'도 만들어 놓았다. 2관애서는 그림위주로 전시하고 있고, 3관은 겸재 정선의 '아! 아름다운 우리강산!'이 열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1관에서는 서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서예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2026.03.06)
"이소는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 굴원이 지은 장편시이다. 이소란 조우遭遇, 즉 근심을 만난다는 뜻이다.
‘이 나라에는 나를 알아주는 이 없는데 나라를 생각해서 무엇하랴’
자조 섞인 이소의 마지막 장이 의미심장하다."
"윤순은 왜 주희의 시 ‘이소를 묻는 양정수에게 답하다’를 썼을까. 양정수는 누구일까.
무릇 명필이란 무엇인가. 명필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공부가 필요한 것일까. "(2026.03.13)
<명필 윤순을 그리다>
차가운 창 아래, 한 사람이 앉아 있다. 밤은 깊고, 세상은 고요하다. 그 고요 속에서 그는 오래된 시 한 편을 불러낸다. 그것은 단순한 낭송이 아니라, 시간 너머의 목소리를 다시 살려내는 일이다. 조선 후기의 명필 윤순은 그렇게 붓을 들었을 것이다.
그가 옮긴 시는 주희의 것이고, 그 시의 뿌리는 다시 굴원의 「이소」에 닿아 있다. 「이소」는 근심을 만난 자의 노래다. 세상에 뜻을 두었으나 세상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마음은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가. 그 물음은 시대를 건너 윤순의 밤에도 스며들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뱃전을 두드리며 읊조렸던 시를, 이제 그는 차가운 창 아래에서 코를 막고 낮게 되뇐다. 강과 호수는 온 땅에 가득하고, 물은 하늘에 떠 있는 듯 아득한데, 그 풍경은 더 이상 눈앞의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풍경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모래사장에 번진 달빛이 배 안을 환히 밝히듯, 한 줄의 시와 한 획의 글씨가 그의 내면을 비춘다.
왜 그는 이 시를 썼을까. 그것은 단순히 옛 글을 옮기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그 시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았을 것이다. 알아주는 이 없는 세상 속에서도 끝내 버릴 수 없는 뜻, 그 고독과 결기를 그는 붓끝에 실어 보냈다. 글씨는 더 이상 글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숨결이 된다.
그가 마음속으로 말을 건넨 이는 어쩌면 양정수라는 이름의 벗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이름 없는 누군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독자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글은 언제나 혼자 쓰이지만, 결코 혼자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명필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흔히 유려한 필획과 균형 잡힌 구도를 떠올리지만, 진정한 명필은 그 너머에 있다. 윤순이 깊이 익혔던 미불의 글씨처럼, 좋은 글씨는 기술을 넘어선다. 그것은 한 사람이 살아오며 쌓아온 시간, 생각, 그리고 끝내 내려놓지 못한 마음이 한순간에 응축된 것이다. 그래서 어떤 글씨는 눈으로 읽히고, 어떤 글씨는 마음으로 읽힌다.
얼마나 많은 공부가 필요할까. 아마도 끝이 없을 것이다. 고전을 읽고, 옛사람의 글씨를 베끼고, 수없이 붓을 들어도, 그것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자리가 있다. 그 자리는 오직 살아낸 시간만이 채울 수 있다. 기쁨과 상실, 기대와 좌절이 켜켜이 쌓일 때, 비로소 한 획이 자신의 무게를 갖는다.
다시 그 밤으로 돌아가 보자. 차가운 창, 낮게 흐르는 숨, 그리고 달빛. 윤순은 그 모든 것을 견디며 한 글자 한 글자를 써 내려간다. 그 글씨는 오래 남아,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쓰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글 속에, 당신의 마음은 얼마나 담겨 있는가.”(2026.03.20.)
"국립중앙박물관은 6개월 만에 재개관하면서, 왜 윤순의 이 시를 첫 작품으로 했을까. "
국립중앙박물관이 긴 휴관을 마치고 다시 문을 열며, 수많은 유물 가운데 하필 윤순의 이 시를 첫 작품으로 내세웠다는 사실은 우연이라기보다 하나의 ‘선언’에 가깝다.
재개관은 단순한 전시의 재시작이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첫 문장이기 때문이다.
"먼저, 이 작품은 소리가 없는 예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시가 흐르고, 호흡이 있고, 시간이 있다.
윤순의 글씨는 격렬하지 않으면서도 깊고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오래 머무는 울림을 준다.
재개관의 첫 장면으로서, 이보다 더 조용하고 단단한 시작은 드물 것이다.
마치 박물관이 관람객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천천히, 그리고 깊이 보라.”
는 또 하나는 ‘이소’가 품고 있는 의미가 아닐까.
그 시의 근원에는 굴원의 ‘고독과 충정’이 있다.
세상과 어긋난 한 인간이 끝내 자기 뜻을 놓지 않는 이야기이다.
6개월의 멈춤 이후 다시 시작하는 순간에, 이보다 더 상징적인 메시지는 없었을 것이다.
멈춤 이후의 사유, 고요 속에서 되찾는 본질.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시간.
윤순의 글씨는 단순한 고전의 재현이 아니라 “시간을 견딘 정신”의 표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문자’이다. 회화보다 직접적이고, 조각보다 내면적이며,
누구나 읽을 수 있지만 아무나 느낄 수는 없는 예술. 박물관이 서화관 첫 작품으로 이 글씨를 선택했다는 것은, 눈보다 먼저 마음으로 들어오라는 초대가 아닐까.
결국 이 선택은 이렇게 읽힐 것이다. 화려한 유물로 놀라게 하기보다, 한 사람의 고요한 정신으로 관람객의 마음을 먼저 열고 싶었다는 것을. 그래서 재개관의 첫 작품은 거대한 보물이 아니라, 한 줄의 시와 한 획의 숨결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선 우리는 전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천천히 깊게 ‘생각하는’ 것이 될 것이다. (2026.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