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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다잠든 나무 May 05. 2024

그 아이는 잘 컸겠지?

치자꽃 향기 휘감길 때는.

드디어 한송이 폈다. 오래도록 봉오리를 맺고 애를 태우더니 드디어 첫 번째가 봉우리를 뚫고 하얗게 활짝 폈다. 치자 꽃은  유난히 향기가 좋아 저절로 향기를 따라서 얼굴을 돌리게 된다. 우선 한송이만 피었을 뿐인데 저녁 어스름해지면 더욱 향기에 끌려 하얀 꽃송이에 얼굴까지밖고 코를 들이대게 된다. 점차 차례로 계속 피어날 텐데 한동안은 그 향기가 온 실내를 휘감겠지. 그날처럼.

드디어  올해도 치자 꽃이 피기 시작했다.  


치자향과 치자꽃을 보노라면 어김없이 그날 그 아이가 생각난다.

벌써 이십 사오 년 전의 일이다. 치자향이 온 교실을 휘감고 있어 복도까지 그 향이 전해질 즈음, 학교 3학년 교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학교폭력에 의한 동급생 상해, 입에도 담기 힘든 단어들이다. 현장을 목도하고는 인과관계를 따져 물을 새도 없이 피 흘리는 아이를 부추기며 119를 급하게 불렀다. 피 흘려 쓰러져 119에 실려 병원으로 급하게 떠난 아이는 다시는 웃고 떠들던 학교에  나타나지 못했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곳으로 홀로 떠나고 말았다.

점심시간을 마치고 5교시가 시작된 지 1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일어난 사고는 순식간이었다. 평소 억누르던 감정이 순간 폭발하며 흉기를 사용하고 만 것이다. 학교 전체를 아니 전국을 충격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후 해당 당사자들은 학교 밖 병원과 법원에서 담당하였다. 이미 학교 울타리의 범주를 넘어버린 것이다. 학교는 학교 안에 있는 수많은 충격들을 달래야 했다. 눈앞에서 그 광경을 보고 충격에서 벋어나지 못하는 다른 학생들의  PTSD에 전념을 다하며 상처를 줄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성원들은 점점 그 사건을 떠올리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학교는 일상으로 자리 잡아가는 듯했다.


아무도 섣불리 그 일을 입으로 끄집어내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도 그 일을 잊지는 못했다. 아주 깊은 심연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숨죽이고 있다. 그렇지만 뚜렷하다. 그때 그 시간에 멈춰버린 교실의 한 장면.

그날 생의 마지막을 그 교실에서 보낸 그 아이, 상해입은  몸을 부여잡고 쓰러져있던 그 아이의 마지막 얼굴.  또 한 순간의 감정을 한번 더 참지 못하고 친구를 쓰러뜨리고 파랗게 질려 울부짖던 또 한 아이의 얼굴.  

치자꽃처럼 하얗게 피어나고 있던 그 아이들의 그 모습에 가끔은 하염없이 깊이 빠져들게 된다.     


치자향이 휙 코끝을 지나면 어느 순간 치자 꽃 향에 길을 잃게 된다. 그날도 창가에 놓인 치자 꽃 화분 한 개는 온 교실뿐만 아니라 교실 밖 복도까지  그 향기를 휘감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그날 치자 꽃 향에 끌려 창가에 놓인 하얀 치자 꽃을 보았을까? 웬만해서는 들여다보지 않기가 더 힘들었을 텐데. 아이들을 닮은 하얀 치자꽃과 그 향기에 코를 들이대 보았더라면 달라졌을까?


치자꽃을 보노라면, 또 그 향기에 이끌리는 이 즈음이 되면 어김없이 그 두 아이를 조용히 떠올리며 기도하게 된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지상의 삶을 마감한 그 아이는 지상에서의 아름다운 향기로 치자 꽃 향이 오래 기억되기를. 또 참지 못한 감정의 휘둘림에 그 후로 오랜 시간 힘겨운 시간을 보냈을 아이의 삶에서도 치자 향기가 오래도록 번져 나오는 향기로운 삶으로 살아가기를... 조용히 눈감는다.

어느새 눈에선 뜨거움이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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