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깐부

by 연산동 이자까야

영·정조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의리(義理). 경종이 재위하던 신축년(1721년)과 임인년(1722년)에 동생(영조)의 왕위계승을 지지했던 노론 대신들이 처형됩니다. 경종이 4년 만에 사망하자 집권한 영조는 ‘신임의리’라고 해 노론을 중용. 훗날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임오년(1762년)에 보호하려 애썼던 소론과 남인을 등용해 노론과 균형을 맞춥니다. 이른바 임오의리(壬午義理)라고 불립니다. 신임의리나 임오의리 모두 군신이 진정한 의리를 주고 받은 장면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권력 유지나 기반을 다지는 데 활용한 측면이 더 큽니다.

21764_1641457099.jpeg 지난달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와 이준석 대표가 부산 서면 젊음의거리에서 지지자들로부터 받은 생일케이크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현대 정치에는 의리가 있을까요.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와 윤석열 대통령 후보는 한 달 전 부산에서 ‘결의’를 맺습니다. 윤 후보가 이 대표에게 “선거운동 기획의 전권을 드린다”고 하자 이 대표는 “대승을 거두자”고 화답. 두 사람이 빨간색 후드티를 입고 서면에서 유세하자 보수층은 “갈등이 봉합됐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걸까요. 국민의힘은 6일 파국을 맞았습니다. 이날 오전 윤 후보는 이 대표의 반대에도 주요 당직 인사를 강행. 의원총회에선 많은 의원이 이 대표의 사퇴를 요구하면서 ‘아사리판’이 돼 버립니다.


민심도 싸늘해졌습니다. 여론조사기관 알앤써치가 MBN·매일경제 의뢰로 지난 4~5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3명을 대상으로 야권 단일후보 적합도를 조사(100% 무선 자동응답·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했더니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43.5%)가 윤 후보(32.7%)를 10.8%포인트 차이로 앞섰습니다. ‘국민의힘 내부 분열은 누구 책임이냐’는 질문에 52.6%가 윤 후보를 꼽았습니다. 이 대표에게 책임이 있다는 응답은 25.5%(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윤 후보는 저녁 늦게 의원총회에 다시 나타나 이 대표를 끌어 안았습니다. 극적 효과를 노린 사전 연출인지, 아니면 진짜 깐부가 된 것인지는 지켜봐야겠지만, 부디 대한민국이 그동안 간신히 끌어올렸던 품격과 도의가 뒷걸음치는 일은 없길 바랍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기본만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