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가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국력이 그대로 적용되는 곳이니 전쟁터나 다름이 없죠. 피상적으로 알고 있지만 전 외교부 장관의 강의를 들었더니 더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지난해 독서모임에서 박근혜 정부 외교부 장관을 지낸 윤병세 씨를 만나 치열한 외교전의 뒷얘기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수년간 준비하고 공을 들인다는 말은 인상 깊었습니다. 윤 전 장관은 하도 민감한 일이 많아 재임 기간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특히 북한의 특이 동향이 감지되면 옷을 입은 채 잠들 때도 여러 번 있었다고 했습니다. 일본과의 현안 해결을 위해 미국 정부를 활용한 점 등을 듣고는 동맹과의 관계가 중요함도 깨달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과의 외교를 어떻게 할지가 궁금합니다. 3·1절 기념사를 보니 어렴풋이 윤곽이 그려집니다. 윤 대통령은 1일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취임 후 처음으로 기념사를 했습니다.
과거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침략을 받은 것으로 윤 대통령은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세계사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된다고 했습니다. 냉정하게 따지면 그런 점이 있죠. 하지만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야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해자에게 '니가 약해서 당했다'고 하면 수긍하겠습니까. 대통령의 기념사에 이런 부분이 없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이와 달리 2018년 첫 3·1절 기념사에서 '가해자' '반인륜적 인권 범죄' 등의 표현을 써가며 일본의 반성을 촉구했습니다. 야당은 이를 두고 "협력은 진정한 사과와 책임지는 자세가 전제돼야 한다. 윤 대통령의 역사관이 의심스럽다"고 비판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일본을 파트너로 규정했습니다.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 경제 등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라고 밝혔습니다. 특히 복합 위기와 북핵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한미일 3자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며 이런 파트너십은 104년 전 조국의 독립을 외친 그 정신과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일본과의 파트너십이 3·1독립운동의 정신과 다르지 않다니 말입니다. 한미일 공조가 북한과 중국에 대응한 자유 진영의 동맹이므로, 이는 자유와 독립을 외친 정신과 큰 차이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뭐 그렇게 볼 수 있겠으나 비약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부끄럽고 슬픈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대목에서 위 부분에서 생길 오해를 차단하려는 뜻으로 읽힙니다. 윤 대통령은 과거의 치욕을 잊지 말고 미래 번영으로 나아가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대통령의 기념사를 전체적으로 보면 일본의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없고 당한 것은 우리 잘못이니 우리의 힘을 키우자는 말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현재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진행 중인 한일 간 강제징용 협상을 고려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최대 현안인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배상 문제의 해법을 도출하기 위해 양국이 막판 속도를 내고 있고, 올 상반기 한일정상회담 개최 여부를 놓고 논의 중인 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 외무성 후나코시 다케히로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지난 주말 비공개 방한한 것으로 전해졌고, 박진 외교부 장관도 전날 징용 피해자의 유족 측과 처음으로 마주 앉아 정부안 의견을 들었습니다.
기념사에서 또 하나 느껴지는 것은 기념사가 짧다는 것입니다. 위안부와 강제징용, 일본의 군사 개입 및 역사 왜곡 등 현안에 어떤 언급도 없습니다. 기념사에 따른 후속 논란을 아예 차단하려 했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과거에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쉽게 용서하고 손을 잡는 모습 또한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윤병세 전 장관이 말한 것처럼 외교가 힘든가 봅니다. 한일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치른다면 이번 기념사가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럼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일본과의 관계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가 무엇일까요. 이점을 분명히 해야 후일 대통령의 기념사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 배상을 받아내고 미래로 간다면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그러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과거는 묻어두고 잘 지내는 데 힘을 쏟아야 합니까. 아님 미래는 필요없고 과거에만 집착해야 합니까. 어느 정도 선에서 반성과 사과, 배상이 이뤄져야 과거를 청산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대통령은 어느 선을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