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6일 밝힌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배상안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푼 것일까요.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날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받아야 할 배상금을 국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대신 지급하는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박 장관은 "이번 배상안은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계승, 양국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라며 "최근 엄중한 한반도 정세 속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인 일본과 함께 양국의 공동이익과 세계 평화번영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배상안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우리 정부가 왜 이렇게 서둘러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정부는 북한의 핵 도발로 한반도 주변 정세가 엄중해 일본과 관계 개선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어 국내 경제가 발전하려면 일본과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한다는 인식도 깔려 있습니다. 뭐 좋습니다. 정부의 관점이 크게 나빠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왜 지금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둘째, 당사자가 반발하는 배상안을 굳이 강행해야 합니까. 피해자들은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일본 기업의 배상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런 건 전혀 없이 한국 재단이 배상한다? 피해자들이 이를 수용하기는 힘듭니다. 아니나 다를까 생존자 3명은 정부안에 반대 의사를 밝혔습니다. 피해자들은 "정부가 일본 가해 기업의 사법적 책임을 면책했다"며 반발했습니다.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는 정부 발표를 본 후 "잘못한 사람 따로 있고 사죄할 사람 따로 있는데 (3자 변제 방식으로) 해결해서는 안된다. 그 돈을 받지 않아도 배 고파 죽지 않는다. 동냥 같은 돈은 안 받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미국의 인기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미국의 UN 대사이기도 한 영부인이 대통령과 함께 러시아를 방문, 동성애를 주장해온 인권 운동가의 석방에 대해 협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부인은 인권운동가가 갇힌 감옥에서 러시아를 향해 형식적인 사과만 하라고 설득합니다. 미국 대통령은 인권 운동가가 이에 동의할 것이다고 보고 러시아 대통령과 협상을 마칩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이 인권 운동가는 영부인의 스카프를 이용해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미국 대통령은 유엔평화유지군에 러시아의 참여를 이끌어내면서도 인권운동가를 석방했다는 외교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당사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꼭 징용 문제 해결을 통해야만 하는 건가요. 징용 문제와 관계 개선 문제를 분리해 처리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요. 물론 일본이 징용 배상 판결을 문제 삼아 소부장 품목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고, 지소미아를 종료하는 등 보복 조처를 해 왔습니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힘들다는 것은 압니다. 그럼에도 이 방식이어야 하는지는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일본 전문가들은 일본이 손 대지 않고 코를 풀었다고 봤습니다. 기무라 간 고베대 교수는 “일본 정부는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좋은 안”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오타 오사무 도시샤대 교수는 "이번 해결 방안은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에 대한 폭력과 인권 침해를 용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와 기업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이번 한국 정부의 배상안을 걱정하는 눈치입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배상안 발표가 나오자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내각마다 입장 차가 달랐는데 어떤 역사인식을 계승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인을 바보로 취급하는 거 같아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제가 느끼는 감정이 보통 한국인이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요. 정말 이렇게까지 하고서 일본과 잘 지내야 하는 건가요.
최근 사회를 뜨겁게 달군 학교 폭력 문제가 생각납니다. 가해자의 형식적인 사과 뒤에 피해자의 피눈물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윤석열 대통령이 내세운 공정과 상식인지 묻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