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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산동 이자까야 May 26. 2021

낯선 공간에서
오래된 것을 마주하다

부산 근대사는 산복도로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 피란민들이 부산항·부산역이 내려다 보이는 구봉산과 보수산·아미산 중턱에 판잣집을 지어 삶터를 일궜습니다. 산복도로는 피난민촌을 연결하기 위해 만든 길.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전해집니다. “야밤에 부산항으로 상륙하던 미군들이 하늘로 빽빽이 치솟은 판잣촌 불빛을 고층빌딩으로 착각해 ‘원더풀’을 연발했다.” 산복도로의 공식 이름은 망양로(望洋路). 부산 앞바다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부산 동구 산복도로 일대 전경. 국제신문

여러 사람을 너르게 품었던 산복도로는 이제 ‘소멸’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전락했습니다. 청·장년들이 낡은 동네를 떠나고 있기 때문.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20%를 넘는 이유입니다. 반가운 소식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부산살이’를 꿈꾸는 청년들이 하나 둘 산복도로를 찾고 있거든요. 


로컬 크리에이터 청년 기업인 ‘영초산방’도 그 중 하나. 대표 상품은 ‘오-올드(O-old) 어반 트레킹’입니다. 오-올드는 낯설다는 뜻의 ‘Odd’와 오래됐다는 뜻의 ’Old‘의 합성어. 트레킹 참가자들은 2시간 동안 초량동~영주동~대청동~보수동~동대신동~부산민주공원을 명상하듯 천천히 걷습니다. 바다를 보며 멍도 때립니다. 골목골목의 잔상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합니다. 낯선 공간에서, 오래된 것을 마주하며, 여유로움을 만끽합니다. 


영초산방은 ‘동네살이 기록하기’라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입니다. 독서 모임과 디자인 씽킹을 통해 오랫동안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고민해 서로 나눈다고 하네요. 전혜인 팀장의 인터뷰가 인상적입니다. “처음에는 산복도로 영상을 찍으려고 월세살이를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산복도로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나를 품어주더라. 이제는 내가 산복도로에서 사람을 맞이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 


요즘 산복도로는 역사·문화의 체취가 서린 이바구길·벽화거리에 유적지 발굴까지 더해지면서 관광지의 가치도 부각되는 추세입니다. 여기에 청년들의 상상력까지 어우러져 ‘산복도로 르네상스’가 열리길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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