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뭐라노'의 마스코트 라노입니다. 라노가 정한 이번 주 '이거 아나' 시사상식 용어는 '인류세'입니다. 인간은 지구에서 우위를 점한 후 마치 혼자만의 것처럼 다 독식해 망가트리고 있어요. 토양, 바다, 대기 등을 더럽히며 지구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기고 있죠.
지구의 45억 년 역사는 큰 단위인 누대(eon)부터 차례로 더 작은 단위인 대(era), 기(period), 세(epoch), 절(age)로 나뉩니다. 공식적으로 현 시점은 현생누대 신생대 제4기 홀로세 메갈라야절입니다. 홀로세는 마지막 빙하기 이후 지금까지 1만1700년 정도 이어지고 있죠.
하지만 인류의 등장과 발전으로 지구는 격변의 시대를 맞게 됩니다. 핵실험으로 인한 방사성 물질 검출, 플라스틱·알루미늄·콘크리트 등 인공물의 증가, 이산화탄소와 메탄 농도의 급증, 대기·수질·토양 오염의 증가, 지구 온난화의 급격한 확대 등으로 특정 기간에 여러 생물종이 급격하게 멸종한 겁니다.
'인류세'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습니다. 인간 활동의 영향력이 기후와 지질을 바꿀 정도로 커진 만큼, 지금의 지질시대를 홀로세 지질시대와 구분되는 새로운 말로 불러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인류세라는 용어는 1980년대에 미국의 생물학자인 유진 스토머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이를 유명하게 만들고 그 중요성을 전파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이죠. 크뤼천은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지구 역사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주장하며 인류세라는 용어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그간 과학자들은 인류세를 입증할 무수한 증거를 발견하려 애써왔습니다. 기존의 지구 기후 시스템이 흔들리고 있다는 징후를 보여주는 식으로 말이죠. 인류세 도입 논의를 주도한 '인류세 워킹그룹'(AWG)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인류 영향이 가장 뚜렷하게 확인되는 표본이 될 만한 지역을 찾으려고 15년간 공을 들였습니다. 그 결과 지난해 7월 플루토늄을 비롯한 1950년 이래 핵무기 실험 흔적이 남아있는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크로퍼드 호수를 표본 지역으로 선정했죠. 그리고 지구에 새로운 시대인 인류세가 도래했는지 평가하는 기준으로 세웠습니다. 오는 8월 부산에서 열리는 세계지질과학총회에서 인류세가 공식 용어로 최종 선언되리라는 전망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국제지질학연합(IUG) 산하 제4기 층서 소위원회는 지난 20일(현지시간) 인류세의 공식 도입을 거부했습니다. 인류세 도입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지구의 45억 년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지질학적 증거가 현재로선 없다는 점을 지적해왔습니다. 이어 상급 회의체인 국제층서위원회가 IUG 규정에 따라 추가 논의를 이어가지 않기로 했고, 인류 역사에 인류세라는 단계를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두고 15년 이상 벌어진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인류세 도입 논의는 어떤 이유로 기각됐을까요? IUG 소위원회에서 인류가 지구에 미친 영향을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반대 표를 던진 지질학자들 사이에서는 인류세의 시작점을 1950년대로 정의하는 데 반대 의견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죠. 일부는 산업혁명이 일어난 18세기 후반 등을 인류세 시작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부는 1만 년 전 최초의 농업이나 수백 년 전 식민지 정복 시대가 아니라 1950년대로 못 박는 것이 너무 협소하고 비과학적이라고 부연했습니다.
인류세란 용어가 공식적인 지질학 용어로 채택되지는 못했지만, 과학계는 이 말이 앞으로도 의미 있게 쓰일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소위원회 표결에 참여한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 킴 고언은 지질시대가 규정되든 말든 인류세는 이미 대세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이미 인류세가 사람들 입에 붙었다. 학술지에서도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용어이지만 지질학계에서는 그렇게 많지 않다"고 설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