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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 '바람 앞 촛불 신세'

by 연산동 이자까야

'외교적 체르노빌 사태'. 영국의 한 일간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간 정상회담을 빗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고성과 설전으로 끝난 미·우크라이나 회담이 1986년 발생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처럼 재앙에 가까운 '외교 참사'였다는 뜻인데요. 동맹보다는 미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트럼프식 외교'가 제대로 확인된 순간이었습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의 동맹에 의존하는 우리나라 역시 트럼프식 외교의 타깃이 될 수 있어 한국 외교도 전례 없는 폭풍을 맞을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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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진행된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의 공개 설전은 외교사에 남을 대참사가 됐습니다. 전 세계로 생중계된 10여 분간 갈등은 벤스 부통령이 러시아와 벌이는 협상에 우크라이나도 참여하라고 촉구한 데 대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는 약속을 수도 없이 어겼다. 무슨 외교를 말하냐"고 따지면서 시작됐습니다. 벤스 부통령은 즉시 "이런 식으로 백악관에 따지는 건 무례하다"고 비판했고요. 트럼프 대통령도 가세해 "미국 군사 장비가 없었다면 이 전쟁은 2주 만에 끝났을 것" "감사하다는 말이나 했느냐" "당신은 미국에 무례하게 굴고 있다" 등의 말로 젤렌스키 대통령을 공격했습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끝이다. 협상을 안 할 거면 우리는 우크라이나에서 나가겠다”고 선언한 뒤 예정됐던 비공개 회담, 오찬, 공동 기자회견, 광물협정 서명식까지 모두 취소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쫓겨나듯 물러가야 했죠. 우크라이나는 이날 광물협정을 체결해 미국의 실질적 안전 보장을 얻어내길 바랐는데요. 회담이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광물협정 역시 무산됐고, 우크라이나가 안전 보장을 얻을 기회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이 '평화를 위한 성실한 약속'을 입증할 때까지 원조를 중단한다"고 밝혔죠.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자금력 국방력 등 막강한 영향력을 무기 삼아 상대적으로 취약한 국가를 굴복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 전략이 3년 넘게 러시아와 싸워 온 동맹국 우크라이나를 상대로도 쓰인 것인데요. 외교도 거래로 여기며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동맹과 우방의 안보도 얼마든지 수단화할 수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확인시켰습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에 새로운 동맹관이 등장했다고 진단했습니다. "미국은 지금까지 경제적 이익보다는 민주주의나 인권 같은 가치를 더 중요시하면서 손해를 보더라도 평화를 지키는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철저하게 미국 이익 우선주의로 전환됐어요. 미국의 이익에 맞지 않으면 동맹이 언제든지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우크라이나 회담에서 명확하게 보여줬죠. '미국에 경제적으로 얼마나 협력하느냐'에 따라 동맹이 더 강화되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대규모의 대미 투자가 수반되지 않는 한 한미 동맹이 취약해질 수밖에 없어요."


미국 이익 우선주의로 재편되기 시작한 국제 질서의 폭풍이 한국을 빗겨나가진 않을 듯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부자 나라'로 불러온 한국에 방위공약 이행을 대가로 더 강력한 청구서를 내밀 수도 있다는 뜻인데요. 미국은 이미 한국을 정조준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일(현지시간) 집권 2기 첫 의회 합동 연설에서 한국을 콕 찍어 "평균 관세율이 미국보다 4배 높다"면서 "한국에 군사적으로나 다양한 방식으로 엄청난 지원을 제공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취임 후 공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전방위적 관세 인상 대상에 한국을 포함하겠다는 뜻을 내포했죠.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에 방위공약 이행을 대가로 더 강력한 청구서를 들이밀 것입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1기 행정부 때 11차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SMA) 협상을 하며 새로운 항목까지 만들어 전략 자산 전개 비용과 병력 순환 배치 비용을 한국에 떠넘기는 데 집착했습니다. 한국이 버티자 미국 측 협상단은 아예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는 전례 없는 상황까지 연출하며 압박을 가했죠. 결국 11차 SMA는 바이든 행정부에 들어서야 타결됐습니다. 앞서 지난해 10월 한미는 2030년까지 적용되는 12차 SMA를 빠르게 타결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구애받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SMA 재협상을 주장하고, 이 과정에서 전략 자산 전개 중단이나 주한미군을 '카드'로 활용해 압박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죠. 트럼프 대통령은 1기 행정부 때 주한미군 철수를 검토한 전례가 있습니다.


또 트럼프 행정부가 대러시아 노선을 완전히 바꾸면 북러 관계에 새로운 동력이 붙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재 북한은 러시아에 파병을 보내는 등 최고 수준의 군사 협력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지금 상황을 고려하면 북미 간 대화에서 러시아가 끼어들고 한국이 배제될 위험도 있습니다.


차재권 부경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의 정치 상황이 안정되면 전방위적으로 공격이 들어올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 한국에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파트너'가 없으니 잠시 '청구서 발행'을 유보했을 뿐입니다. 일단 캐나다 멕시코 유럽부터 차근차근 정리하고, 한국의 리더십이 복원되면 본격적으로 치고 들어오겠죠.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반도체 에너지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공격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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