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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로 산다는 것

by 연산동 이자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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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롤 판사. 울산 태생인 이정미 전 헌법재판소 권한대행의 별명입니다. 이 전 권한대행은 통합진보당 해산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의 주심과 재판장을 각각 맡았습니다. 그때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헤어롤을 머리에 꽂고 출근한 것인데 인구에 회자돼 부끄러웠다고 하더군요. 2017년 3월 정년 퇴임한 그는 요즘이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일을 할 때는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보모가 아이들을 방치해 가슴이 찢어지기도 했다. 늘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었다.” 이 전 권한대행은 환갑이 되어서야 비로소 평안을 얻었다고 합니다.


영화 ‘기생충’의 제작사인 바른손이앤에이 곽신애(53) 대표도 비슷한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30년 가까이 영화인으로 활동한 그의 목표는 ‘최대한 현역으로 오래 버티기’.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오랫동안 현장에 남는 여성 영화인이 너무 적기 때문이랍니다. “후배들이 ‘선배가 버티는 시간이 후배들도 버틸 수 있는 시간이다. 선배가 60살까지 하면 나도 할 수 있다’고 해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을 다잡게 되죠. 길게 가자!” 두 워킹맘의 성공은 아주 드문 사례입니다.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남성보다 몇 배의 노력을 했을테니까요.

21764_1627215950.jpg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 대표(좌), 이정미 전 헌법재판소 권한대행(우). 국제신문DB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 가치는 연간 1380만 원으로 남성(521만 원)의 2.6배. 여성의 ‘집안일 독박’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임금 격차도 큽니다. 2019년 여성의 평균 월급은 남성(369만 원)의 64.2%인 237만 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격차는 13% 남짓입니다. 통계만 보면 우리나라 여성, 특히 워킹맘은 적은 월급에, 아무도 가치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출산 고통과 가사노동에 경력단절까지 감내해야 하는 슈퍼우먼입니다.


최고 엘리트인 판사조차 육아 때문에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녔으니까요. 여성 징병제 도입과 여성가족부 폐지 논란을 보면서 몇 가지 잡념이 떠오릅니다. 우리 사회는 ‘엄마로 산다는 것’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해를 하고 있을까, 정치권이 이 전 권한대행이나 곽 대표의 특수한 사례를 남녀평등의 증거로 악용하는 것은 아닐까, “길게 가자”는 다짐에 얼마나 많은 한이 담겨 있는지 과연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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