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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민에서 느끼는 것들(리얼 아이디)

by 미국의 할배

며칠 전의 일이다.

아침 일찍 리얼 아이디(REAL ID)를 발급받으러 간다던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갑을 잃어버리고 왔으니, 아버지 건강 상태가 괜찮다면 가져다줄 수 있겠느냐는 조심스러운 부탁의 전화였다.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아 몸이 약간 불편했지만, 두 번째로 새벽부터 가서 기다리다가 또 빈손으로 돌아올 아들을 생각하니 지갑을 찾아들고 교통국(DMV: Department of Motor Vehicles)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도 집 거주를 증명하는 서류를 챙기지 않아 발급을 받지 못했던 아들은 이번에는 지갑을 가져가지 않아 필요한 신분증을 가져가지 못한 것이다.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데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하는 아들을 보니 은근히 화가 올라오기도 하고, 앞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아들의 삶을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약 40여 분을 운전해 도착하니, DMV 앞에는 길게 늘어선 줄 사이로 아들과 아들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미국의 운전면허 발급 절차는 느리기로 정평이 나 있다. 새벽같이 가서 기다려야 겨우 순번을 받을 수 있고, 설령 순번을 받았다고 해도 바로 업무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어서, 뒷번호를 받은 사람은 하루를 꼬박 소비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른 새벽부터 줄을 서기 시작하고, 조금만 늦어도 대기표조차 받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서 처음 겪게 되는 미국의 느린 일 처리 속도를 경험하는 곳이 바로 이 DMV이다.

SE-01ddd978-e01a-420d-b1e1-797cc88d893b.jpg?type=w773 DMV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아들이 발급받으려는 ‘리얼 아이디’는 미국의 새로운 운전면허증이다. 이 면허증은 사실상 공식 신분증 역할을 하는데, 기존에는 운전면허증만으로 국내선 비행기 탑승이나 주요 장소 출입이 가능했다. 하지만 2025년 5월 7일 이후부터는 신분 확인이 완료된 리얼 아이디가 아니면 국내선 비행기를 탑승할 수 없고, 국가의 중요 보안구역에도 들어갈 수 없게 된다. 미국에는 우리나라의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사회 보장 번호인 SSN(Social Security Number)가 있기는 한데, 이 번호에는 사진이 없어서 사진이 있는 증명서(Picture ID)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여권이나 운전면허증으로 신분증을 사용한다.


리얼 아이디 제도의 도입 배경은 9/11 테러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9/11 위원회의 권고로 신분증 강화를 위한 법안이 2005년에 통과되었고, 몇 차례 시행이 연기되다가 마침내 올해 5월 7일부터 본격 시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리얼 아이디가 없고 여권이나 다른 신분증명서도 없는 사람은, 앞으로 국내선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된다.


최근 미국에서는 합법적 체류 허가가 없는 사람들을 추방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는 데다, 이제는 운전면허증 발급조차 예전처럼 간단하지 않아, 불법 체류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큰 장벽이 생긴 셈이다. 특히 자동차 없이는 생활이 어려운 미국의 현실에서, 신분과 무관하게 운전면허를 발급받던 과거의 정책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어서, 이래저래 미국을 불법으로 입국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나 앞으로 입국하는 사람들에게는 설자리가 점점 더 좁아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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