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는 '신용의 사회'라 불린다. 이는 신용을 잘 지키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여, 그 사람을 사회 구성원으로 어떻게 평가할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미국에 이민을 와서야 비로소 이 신용, 즉 '크레디트'의 중요성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신용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 생활에서 그 중요성을 크게 체감하지는 못했다. 당시 나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고, 자동차를 구입할 때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신용등급이 좋으면 이자율이 낮다'는 말도 들은 적은 있지만, 그 차이가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적은 없었다. 또한, 아파트를 구입할 때도 기존 전세금을 빼고 약간의 현금을 보태 바로 구입했기 때문에, 은행 대출을 받으며 신용을 점검하거나 이자율을 따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미국으로 이민을 온 지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아, 신용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첫 번째로, 자동차를 구매하려 했는데 크레디트 점수가 없다는 이유로 대출이 전혀 되지 않았다. 더불어 현금도 $10,000 이상은 받지 않는다고 하여, 결국 $9,990짜리 중고차를 현금으로 사야 했다. 그런데 심지어 그 현금도 바로 받지 않고, '캐시어스 첵(Cashier’s Check)'으로만 받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은행에 가서 수수료를 내고 캐시어스 첵을 발급받아 자동차 값을 지불했던 기억이 있다. 또한 집을 구매할 때도 크레디트가 없어서 현찰로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는 크레디트가 없으면 은행과의 금융 거래가 매우 어렵다. 설사 거래가 가능하다 해도 매우 높은 이자율을 감수해야 하거나 보증금으로 현찰을 맡겨야 가능하다. 특히, 크레디트가 없으면 아파트나 집을 월세로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설사 구할 수 있더라도 보증금을 훨씬 더 많이 요구하거나, 크레디트가 좋은 사람의 '코사인(Cosign, 공동 서명)'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다.
미국의 크레디트 점수는 일반적으로 300점에서 850점까지의 범위로 관리된다. 점수 구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등급이 나뉜다:
불량 (Poor): 580점 미만
보통 (Fair): 580 ~ 669점
양호 (Good): 670 ~ 739점
매우 양호 (Very Good): 740 ~ 799점
우수 (Excellent): 800점 이상
이 등급에 따라 금융 거래의 조건이 크게 달라진다. 크레디트 점수가 낮으면 아예 돈을 빌릴 수 없거나, 빌린다 해도 매우 높은 이자율을 감당해야 한다. 실제로 내가 아는 지인은 크레디트 점수가 낮아, 다른 사람은 6%대 이자율로 사는 자동차를, 연 24%라는 매우 높은 이자율로 차를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많은 미국 사람들이 최소한 '양호(Good, 670~739점)' 수준의 크레디트 점수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데, 대부분의 금융 거래에서 이 정도의 점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크레디트 점수를 잘 관리하는 것이 곧 돈을 버는 길이며, 자신의 신용을 증명하는 중요한 수단인 셈이다.
이 크레디트 점수를 흔히 FICO Score라고 부르며, 미국의 주요 개인 신용 평가 기관인 Equifax, Experian, TransUnion에서 점수를 관리한다. 이들이 평가하는 주요 항목과 그 비중은 다음과 같다:
결제 내역 (Payment History): 35%
미납 금액 (Amounts Owed): 30%
신용 기록 기간 (Length of Credit History): 15%
신규 신용 (New Credit): 10%
신용 종류 (Credit Mix): 10%
결국, 이민자든 현지인이든 미국에서 살려면 크레디트 관리는 필수다. 나도 '신용이 자산이다'라는 말을 실감하며 내 크레디트 점수를 유지하기 위해 늘 긴장하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