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생긴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도, 마음도, 기분도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 또한 눈에는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귀국하자마자 터진 코로나에 외출이 적었던 지라, 상품을 구입하고 서비스를 받을 일이 드물었다. 불편할 일도, 고마울 일도 적다.
딸아이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 비대면으로 주고받는 앱 쿠폰 선물을 사용하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럽다.
주말 저녁 강남역에 놀러 나온 젊은이 두세 명이 무인 계산대 앞에 있길래, 아이스크림 바가 있는 왼쪽 카운터를 바라보았다. 직원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에게 쿠폰을 보여주고 계산을 한다. 무인 카운터가 있는 맥도널드는 가고, 무인 카운터가 없는 버거킹은 안 가던 독일 라이프와는 다른 선택이다. 독일이었다면, 기다렸다가 최대한 기계로 주문하였을 터이다.
6가지 맛을 고르고도 쿠폰의 잔액이 남아, 아이가 먹고 싶다는 음료를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6가지 맛을 적어서 달라며 메모지와 볼펜을 준 직원이 아이가 주문한 음료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찬찬히 볼 시간이 났다. 내 눈엔 이제 아르바이트 직원들이 어리고, 예쁘다. 생경한 기분이다. 내 아이가 틴에이저가 되고, 주문을 받는 직원의 나이가 내 아이에게 다가가고 있다.
음료를 먹는 내내 우리가 주문한 하프갤런이 담길 둥근 종이통은 빈 채로 작업대에 놓여있다. 아이와 음료를 마시며 직원을 보니, 매장 안쪽 작업장을 빗자루로 쓸고 있다. 손님이 없으니 작업장 선반도 닦는다.
아이가 음료를 2/3쯤 먹었을 때, 직원에게 말을 걸어본다.
그녀가 카운터에 놓인 종이팩을 들어 보이며, 지금 할 꺼에요라고 말한다.
음료를 끝내고, 카운터로 가보니 나의 주문인 듯해 보이는 종이백이 놓여있다. 직원은 어디 있나 하고 둘러보니 작업장 끝쪽에서 아이스크림을 푸고 있다.
" 이거 가져가면 되나요? "
그녀가 대답 없이 턱으로 맞다는 사인을 보내준다.
10분 후 집에 돌아와 종이백을 여니, 아이스크림 통이 뒤집혀 있다. 종이백 속엔 핑크색 아이스크림 뚜껑이 보여야 하는데 하얀 바닥부터 보인다.
거실 소파에 앉은 남편에게 들어가서부터 뒤집혀 포장된 아이스크림 통 이야기를 해주었다. 남편이 매장에 전화를 건다.
" 원래 하프갤런은 뒤집어서 포장해드려요."
매장을 나온 지 10여분이니, 포장해준 직원이거나 함께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
돌아온 답에 남편은 황당하다며 씩씩 거렸고, 호박씨는 Pandora를 떠올렸다.
덴마크 브랜드인 판도라는 팔찌의 밴드와 밴드를 채울 장식인 Charm도 선택할 수 있는 유럽 대표 팔찌 브랜드다. 선택의 폭이 넓어 베* 아이스크림 같은 주얼리다. 참의 가짓수를 세어보자면 31가지가 아닌 31,000가지 일 것이다. Charm을 일일이 고르려고 매장을 다니곤 하다 프랑크푸르트 명품거리 Zeil에서 불친절한 직원을 대하게 되었다. 매장에 전화를 하고, 본사에 투서를 하고 답을 받았음에도 혼자 판도라 매장을 가는 일은 다신 하지 않았다. (호박씨의 판도라 이야기 : 명품이란? <자일 판도라, Zeil Frankf..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판도라 매장만 가지 않으면, 은근한 인종 차별과 정교한 불친절함을 당하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그럼 판도라 웹사이트에서 시간을 들여 참을 고르고, 사이즈를 재서 참을 끼울 밴드를 구매했다.
가족들과 함께 간 런던 Picadilly Circus에 판도라 매장이 보인다.
" 영국에 왔으니까, 영국에만 있는 Charm이 있을 텐데."
각 유명 유럽 도시마다,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참을 판매하고 있는 줄 익히 판도라를 사랑하는 나를 알고 있었다. 들어가 보자고 말하는 남편의 기운에, 그리고 남편이 있어 생기는 용기에 꿀꺽 침 한 번을 삼키고 매장으로 들어가 본다.
키가 작고 짙은 머리색을 한 직원이 " Hello."라고 우리를 맞는다. 영국 한정판 참을 보여달라고 하니, 내 팔목에 찬 팔찌부터 빼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 참을 구입한 내가 밴드에 마음대로 끼워둔 참을 빼 보이며, 바른 착용법을 알려준다. 그녀에게 독일에서 당한 불친절함에 대한 스토리를, 판도라 매장을 걸어 들어온 것이 몇 년 만이라는 스토리를 삼켜둔 채, 웹으로 구매해서 잘 모른다며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행여 그녀가 갑자기 다른 태도라도 취할까 싶어 전전긍긍이다. 그녀가 나에게 말한다.
" 당신의 선글라스 정말 마음에 드는군요. 어디서 샀어요? "
선글라스를 벗어서 안쪽을 보여주었으면, 그녀의 칭찬과 질문에 정답을 줄 수 있었을 테다.
그런데, 그녀의 말에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 고마워요. 독일에서 샀어요. Super 어쩌고 저쩌고 하는 브랜드인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나요."
라는 오답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영국 여왕님 왕관 모양의 30유로짜리 참 하나를 선택했다. 재 유럽 기간을 통틀어 가장 친절한 영국인을 만난 날, 부랴부랴 그녀의 환대를 받으며 도망치듯 매장을 나왔다.
상처가 나면, 딱지가 생긴다. 딱지 위엔 연고를 발라도 소용이 없다. 연고는 상처가 난 즉시, 피가 멈추면 발라준다. 연고는 상처를 낫게 도와준다. 몸이 만들어낸 딱지에는 연고를 흡수할 수 있는 틈은 없어서, 딱지가 생기고서야 바른 연고는 허사다.
젊은 아이스크림집 아르바이트생처럼 젊었다. 사고 싶은 것도 많았다. 사야 하는 것도 많았다. 배달은 오지 않았고, 택배는 이용하기 불편한 곳이 유럽이다. 독일인과 얼굴을 맞대어만 돈을 쓰고 원하는 물건을 받는 것이 가능한 곳에서 5년을 보냈다.
소통 속에서 생긴, 보이지 않는 상처들은 떠나옴으로써 해결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같은 자리에 다시 상처를 입어서, 상처는 아물지 않았었다. 상처 입었던 곳을 떠나왔으니 절로 치료되어있을 것이라 믿고 상처의 존재에 대해서 망각해갔다.
마음의 상처는 어찌 치료해야 할까?
오늘은 이런 방법을 선택해본다. 전화로 그녀를 나무라 보려고 했지만, 그녀는 사과할 생각이 없다. 주말 저녁, 어린 그녀도 매장 밖 강남역으로 나가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영화를 보며, 다른 이가 퍼주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애꿎은 손님들에게 은근한 짜증을 내어본다.
대륙 건너, 프랑크푸르트 명품 거리에도 그녀가 있다. 계속해서 그녀가 일하는 판도라 매장에 방문하는 손님들처럼, 그녀도 훌쩍 여행을 떠나 그녀가 좋아하는 것에 돈을 쓰고 시간도 쓰고 싶다. 열대의 동남아 어딘가로 가서 독일인들이 즐기는 선탠을 하고 싶다. 하지만, 그녀는 갈 수 없다. 돈 많은 아시안들은 계속 그녀가 일하는 매장으로 꾸역꾸역 들어온다. 가장 바쁜 시간, 어느 가을의 한낮 Zeil에서 여행객들을 대하는 그녀의 자아는 날카롭다 못해 뾰족해져 그녀 자신도 찔러댄다.
딱지가 제대로 자리 잡기 전에 떼내면 상처가 덧난다. 상처의 딱지는 자리 잡은 지가 꽤나 된 것들이니, 이제 떨어져 나갈 때도 됐다. 딱지를 떼어내고 늦었지만 연고도 발라본다. 지금 발라본 들 무슨 소용이 있냐고 하겠지만, 내 맘대로 해보려 한다. 그녀들을 생각하고, 그녀들의 입장이 되어봄으로써, 내 상처는 엄연히 나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