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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러시아 사람 한 명쯤은

by 호박씨

당연히 있다. 아이가 국제학교를 5년 다니면, 아는 러시아 사람 한 명쯤은 다들 있는 거 아닌가? 헛소리는 여기까지만.

러시아가 결국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었고, 세계는 돈바스라는 지역을 주시하고 있다. 한국 들어와서 동학 개미가 된 호박씨는 침공은 안 했으면 했지만, 일은 벌어졌고 코스피는 나의 바람과는 거리가 있는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안나가 딸과 같은 반이 되기 전까지 나에게 러시아는 안나 까레리나와 톨스토이의 나라다. 알쏭달쏭하고 속을 알 수 없으며 뭔가 나와는 결을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야생의 맛이랄까?

안나는 딸이 1st grade, 국제학교 유치원 소속 1학년으로 올라갔을 때 국제학교 전학을 왔다. 그때 딸의 교우관계는 애매했다. 매끄럽지 못했다는 편이 더 맞는 표현이겠다. 한국에서 온 여자애들과 딸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했다. 딸은 그 뒤를 따라다니기보다는 혼자 있기를 선택한 듯했다.

보기에 안타까운지라 엄마인 호박씨는 호시탐탐 딸을 데리러 가며 전입생들을 살피다 안나를 발견했다, 안나 엄마도 일을 하는 터라 안나는 한국으로 치면 방과 후 돌보미, After school care를 유료로 계속 이용하고 있었다. 돌보미 가는 것 보다야 학교가 1분 거리인 우리 집에 Playdate를 오면, 안나 엄마의 돈도 절약될 것이다.

유치원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면, 누가 오늘 누구랑 playdate 하는지 빤히 들여다 보인다. playdate를 하려면 엄마가 데리러 와야 하기 때문이다. 스쿨버스를 타는 애도 걸어가는 애도, playdate를 하게 되면 하교 방법이 달라지게 된다. 그러니 초대한 엄마가 가서 선생님에게 놀러 올 친구를 인계받으며, 달라진 하교 방법에 대해 담임 선생님께 고하는 편이 편리하므로, 플레이 데이트를 하는 경우 엄마가 픽업을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딸아이는 그게 그리 부러웠다. 플레이 데이트가 없는 날이 대부분인 딸을 나는 데리러 가는 대신에, 스쿨버스를 타고 오게 했다. 유치원에서 학교 본관 정문까지 오는 교내 셔틀을 타고 내리면, 딸아이가 잠시 잊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억력이 점점 좋아져서 내리면서 까지도 섭섭함이 표정에서 묻어났다. 한국 여자애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서 픽업되어가는 것이 많이도 부러웠다.


겨울 미녀 같이 생긴 안나 엄마는 개학 첫날 오리엔테이션에서 얼핏 보니 영어가 서툴렀다. 안나 또한 그러했다. 그러니 우리 집에 놀러 오면 네이티브보다 더 반듯한 영어를 하는 우리 딸과 대화도 되고, 방과 후 비용도 절약되니, 초대한다면 응할 확률이 높을 것 같다. 거절당하긴 질색이다. 내가 거절당하는 건 괜찮은데 딸이 거절당하는 건 더는 당하기가 싫다.


감이 맞았다. 반에서 공유되고 있는 이메일 연락처로 안나 엄마에게 초대 이메일을 발신하니 금세 답이 왔다. 그녀의 핸드폰 번호로, 왓츠앱 친구를 맺고 말을 거니 그녀가 서툰 영어를 구사하며 독일어가 더 편하다고 한다. 서툰 영어를 부끄러워하는 그녀가 나는 낯설다. 이미 러시아어와 독일어를 구사하는 그녀가 영어를 당연히 잘해야 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나 또한 그러하다. 한국사람인데 이만큼 영어를 하고, 딸아이의 놀이 친구를 찾는 것 자체로 스스로에게 감사해했다. 그러니 안나 엄마도 참 대견했다.


처음 안나를 데리고 우리 집에 오던 날, 안나는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게 와서 딸아이와 잘 어울려 놀았다. 무엇보다 입에 맞을지 미심쩍어하며 차려낸 군만두를 해치우는 안나가 좋았다. 사랑해요, 비비고.

그리고 안나 엄마는 약속한 시간보다 30분 정도 늦었다. 인형같이 조그마한 안나의 동생을 데리고 왔다. 워킹맘의 기운을 풀풀 풍기면서 말이다. 금발에 푸른 눈을 한 러시아 미녀가 한 손으로 작은 아이를 안고 큰 아이를 데리러 왔다. 업무를 마치고 온 그녀에게서 멋짐이란 것이 묻어났다. 연신 늦어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녀를 찬찬히 보니 어리다. 그렇지. 안나가 첫째라면 그녀는 어릴 수밖에 없다. 이제 독일 나이로 3살이 된 안나 동생 나이로 계산해보아도 그녀는 어릴 수밖에 없다. 그녀가 두 아이를 데리고 사라지고, 난 인사하는 러시아 사람이 하나 생겼다며 뿌듯해했다.


바로 그다음 주에 또 놀러 오라고 하면 헤퍼 보일까 싶어, 2주 후 금요일에 또 놀러 오겠냐고 하니 안나 엄마는 고맙다고 초대에 응했다. 그날도 안나와 딸을 학교에 데리러 가니, 한국 엄마들의 시선이 쏟아진다. 이게 금발 advantage, 금발 효과다. 알고 말고다.

첫 초대보다는 수다가 늘은 안나가 정체를 밝혔다. 안나 엄마는 우크라이나 사람이다. 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다른 나라다. 엄연히 둘은 독립된 국가다. 딸과 나를 중국의 자치구 어디쯤이라고 누군가 생각했다면 가만히 안 두었을 테다. 또 배운다. 아직 글로벌한 인간이 되려면 갈 길이 멀었구나 싶다.

안나는 이것저것 다른 이야기도 늘어놓는다. 아빠도 독일 사람, 오빠도 독일 사람이랜다. 오빠가 있냐고 물으니, 오빠의 엄마는 독일 사람이라고 말한다. 엄마가 둘이구나. 국제학교 안에서 워낙 다양한 가족과 결혼의 형태를 보아온 지라 놀라지도 않는다. 러시아 미녀인 줄 알았던 이는 , 우크라이나 워킹맘이었으며 그녀에겐 첫 번째 결혼이 그녀의 배우자에겐 두 번째 결혼이다.


왠지 오늘도 안나 엄마는 제 시간을 못 맞출 듯 한 촉이 올 때쯤, 안나 엄마에게 메시지가 왔다. 안나의 할아버지가 안나를 데리러 온다고 했다. 안나네 집이 멀지 않아서 내가 안나를 차로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하니, 안나 엄마가 안나에게 독일어로 말했다. 할아버지가 안나를 데리러 집을 출발하셨는데, 할아버지는 핸드폰이 없으시다고 한다. 안나 할아버지가 도착하시길 기다려야 한다.

안나네 집은 Tauna bad라는 시립 수영장 주변의 언덕 위 고급 주택가에 위치했다. 우리 집에서는 차로 10분, 걸어서는 30여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30분이 지난 지가 한참인데 안나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 안나와 딸은 집 앞 주차장에서 뛰어다니기도, 정원의 풀을 뜯어보기도, 짐나스틱 시간에 배운 텀블링을 해보기도 하며 시간을 채워나갔다.

드디어, 나타나신 우크라이나 할아버지. 왜 이리 시간이 걸리시나 했더니, 안나 동생을 유모차에 태우고 오신 것이었다. Tauna bad 언덕길을 다시 올라가실 셈이다. 유모차에 아기에, 안나까지 보태진 길을 나서는 할아버지를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었다. 안나에게 할아버지와 동생을 차로 데려다줄 터이니 할아버지에게 통역을 해달라고 했다. 안나 엄마의 친정아버지는 고집이 세셨다. 안나의 우크라이나 말에도, 나의 영어에도 할아버지는 고개를 젓는다. 급한 마음에 안나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바쁜 워킹맘 안나 엄마는 역시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이를 어쩐다. 한 손에는 안나의 손을, 한 손으로는 유모차를 밀며 길을 나서는 우크라이나 노인의 뒤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무거운 안나의 책가방을 유모차에 걸어드렸다. 선선히 나서는 하얀 머리의 구부정한 노인을 보며 왜 친근함을 느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 주 안나 엄마는 주말에 딸아이를 보내라며 초대를 한다. 아침 일찍 보내서 하루 종일 놀다 가라고 한다. 주말 플레이 데이트는 딸아이가 오랫동안 기다려왔고, 부러워하던 것이었다. 딸이 소원 성취를 하는 순간인데, 워킹맘인 안나 엄마가 그녀의 쉬는 날을 써버리겠구나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한 번 우리 집 왔으면 한 번은 자기 집에 와야 한다는 안나 엄마의 계산은 사실 당연한 것이지만,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국제 학교에서 외국인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든 정성으로 서양 친구를 초대해보는 아시안 엄마를 이용해 먹는 이들을 수도 없이 봐왔으니까 말이다. 그 이야기는 차차 하던지 해야겠다. 아직 분이 안 풀렸다. 언제쯤이면 덤덤히 풀어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아이는 신나서 갔다. 주말이라 남편이 데리러 갈 수도 있었지만, 안나 엄마 사는 모습이 궁금해 픽업을 갔다. 커리어 우먼으로 양손에 아이들 손을 잡고, 킬힐을 신고 있던 그녀는 간데없다. 앞치마를 두르고 아이들에게 망고를 잘라주는 현모양처가 하얗고 너른 그녀의 주방에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독일인 남편과 인사를 하면서도 나는 안나 엄마만 바라본다. 잡지에 나올 법한 금발 미인의 껍데기를 쓴 순종적인 여성을 맞닥뜨린 순간 당황스럽기도 혼란스럽기도 하다.


우크라이나의 소식에 안나 엄마의 친정아버지를, 안나 엄마를 떠올린다. 방학이면 우크라이나의 안나 엄마 친정집에 놀러 갔다 온 안나가 보여주던 사진도 떠오른다. 그리고 월드 페스트에 안나가 입고 왔던 고운 우크라이나 의상도 떠올려본다.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다. 부디 별일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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