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속 수잔'과 킴벌리는 다른 사람이다. 영화보다 삶이 더 영화 같다는 것은 마흔을 넘기며 익히 알게 된 진리이다. 그러니, 킴벌리에게 어떤 동정 어린 시선도 의심 어린 시선도 섣불리 내밀면 안 되는 법이다. 하지만, 나에게 다가와 한국계 입양아라고 밝힌 킴의 속이 궁금했다.
킴은 간호사였다. 산부인과 전담 간호사라 아기가 나온다는 소식에 출동하기를 여러 번이었는데, 셋째를 낳고 보니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고 했다. 남편의 독일 발령이 킴에게는 휴식 같은 시간이 되었으면 했다. 하지만 킴은 쉴 새 없이 일한다.
국제학교의 부모모임을 이끌어가는 Parent teachers group, 줄여 PTG라고 부르는 집단이 국제학교를 인터내셔널 하게 만든다. 국제학교는 가족단위로 낯선 땅에 온 국제학교의 외국인 가정에게 구심점이 된다. 그러니, 부모모임은 조직적으로 해야 할 중요 업무가 많다. PTG는 회장, 부회장, 그리고 각 학교 activity 분야의 임원들로 구성된다.
아이가 셋인 킴은 국제학교 온 지 1년이 안되어 회장 선거 나섰다. 하고 많은 미국 엄마들 중에서, 워킹맘이 아니었던 이들도 많은데, 하필 킴이 매일 학교를 출근하고, 회장이 되고, 학교의 대소사를 챙겼다.
학교에 가면 킴이 있었다. 첫날부터 삽질을 해대고, 학교만 갔다 오고 나면 밤에 혼자 이불 킥을 해대던 나였는데 킴이 부모모임 회장이 되면서부터는 학교 활동에도 편안함을 느꼈다. 절친이 학교 회장 된 기분이랄까?
킴에 뭔가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킴이 주기만 했던 것이었다.
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방학인데 뭐 할 거야? 우리 레고랜드 놀러 갈까?"
주재 첫해의 방학이란 당황스럽다. 일단 방학이 언제 오는지 파악을 하는데에 시간이 걸린다. 방학은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2달도 하는데, 무엇을 하며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오롯이 혼자 계획하고 결정해야 했다.
한국 엄마들과 평소 친했다면, 주변에 물어 해결하면 되었을 것이다. 함께 놀러 가거나, 아이들을 같은 클럽에 넣으며 엄마들끼리 어울려 다니다 보면 방학은 훌쩍 지나갔겠지.
하지만, 주재 도착 6개월 안에 아이들과 같은 학년의 엄마들과는 좋게 지내긴 힘들겠다는 판단이 서버렸다. 돌이켜보면 무엇을 그리 단호박처럼 판단까지 내리며 관계를 규정했을까 싶다. 독일에 끼워 맞추고, 국제학교에 끼워 맞추고, 열심히 맞추기를 하고 나니 한국 사람에겐 맞춰 들어가기가 싫었다. 싫은 티를 들켜서 나를 모나다며 평하는 이가 생겨났다. 한 다리만 건너면 주방 숟가락이 몇 개 인지도 다 아는 주재 사회에서 6개월 만에 모나다는 소리를 듣게 되니, 한국 사람만 보면 도망이란 걸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혼자, 두 아이들과 맞게 된 방학의 시작에서 킴이 놀러를 가자고 한다.
고맙다. 마음속 저 바닥으로부터 고마움이란 것이 차올랐다. 모나다고, 맞추기 싫어한다고 등 뒤에서 수근 거리는 이들 때문에 한 없이 작아지는 나에게 손 내밀어 주는 이는 미국인이지만, 한국인인 킴이다.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다니던 어린이집과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녔던 친정아버지의 약국 이렇게 정해진 두 개의 장소만 갈 줄 알던 나였다. 차가 없으면 어디도 가기 힘든 프랑크푸르트 외곽의 삶을 살려면 운전을 해내야만 했다. 독일 도착 3개월 만에 왼쪽 사이드미러를 해치운 사고를 쳤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그래도 Günzburg에 있는 레고 랜드까지는 아우토반을 달려 300km이 넘는 거리다. 침을 한번 삼켜 봐도 용기가 안 난다. 킴의 메시지를 읽다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킴의 큰 딸인 15살 켈리의 광팬인 6살 딸, 킴의 막내아들과 한 반이고, 영어가 아직은 서툰 8살 아들이 옆에서 TV를 보고 있다. 방학 내내 TV만 보고 있을 순 없다. 난 엄마니까 하고 주먹을 꼭 쥐어본다. 한국 엄마들끼리 놀러 가는 것이 사실 부럽기도 하고, 마음 맞는 아이들 친구 엄마랑 1박 하면서 수다 떨어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외롭다. 이런 상황도 운전대 잡기를 부추겼다.
혼자서는 도저히 힘들 것 같아서, 큰 아이와 같은 반 여자아이 엄마 H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한국인인 H도 운전이 안되긴 마찬가지만, 여러모로 그녀가 제격이다. 킴이 한국인 입양아라는 것을 알고부터 친근하게 킴을 여기는 기색이고, 영어가 유창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언어로든 말하기와 자신을 표현하기를 즐기는 H는 분위기 메이커다.
새벽같이 H의 집으로 가서 H와 H의 딸을 픽업하고, 킴과는 레고랜드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우토반은 운전할 만했다. H가 옆좌석에 앉아 있어 줘서 든든하기도 했고, H가 길을 봐주고 말동무도 해주었으니 운전은 괜찮았다. 문제는 허리였다. 장시간 신경을 바짝 쓰고 운전을 하고 나니, 평소에는 살짝 신경을 누르던 허리뼈가 신경 위에 주저앉아 버렸다.
킴은 도착한 지 꽤 됐다며, 세 아이들과 레고 랜드 입장해 있겠다고 한다. 마음은 급하고 지쳤고, 걸을 때마다 허리 통증이 심했다. 킴을 만나서 영어를 할 수 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H 언니에게 힘드니 킴을 찾으러 가는 것은 천천히 하자고 했다. 킴. 미안해요.
레고랜드 도착해서 1시간여 지나서야 킴의 일행과 상봉했다.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첫째 켈리와 막내 라이언이 싸우기 시작하더니, 라이언이 켈리의 긴 머리채를 잡았다. 킴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킨다.
아들은 사실 놀이기구를 못 타는데 라이언에게 차마 놀이기구 무서워서 못 탄단 소리를 못해서 배 아프다는 거짓말을 하고는 나만 쫓아다닌다. 놀이기구 못 타는 나를 닮아서 그렇다. 딸아이만 이것저것 타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막상 나와 아들은 이래저래 둘러대며 타지 않으니 딸아이도 불만이 컸다.
그렇게 하루가 흘러갔다. 저녁노을이 내리자, 우리는 레고랜드 내의 레고 호텔로 향했다. 미리 레고 호텔 1박과 저녁 뷔페를 예약해두었다.
아이들은 먹고 싶은 것을 골라먹고 레스토랑 앞 레고 놀이터로 우르르 몰려나간다. 독일 여름의 해는 길기도 길어 그 시간까지도 어스름에 아이들은 술래잡기를 할 수 있었다.
드디어, 여자 셋 시간. 킴이 말한다.
" 오늘 중에 제일 좋은 시간이야."
킴도 나도 힘들었다. 좋자고 함께 했는데 막상 좋은 시간은 지금 잠깐이다.
좋은 시간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은 사실 뒷담화다. 킴은 Parent teachers group 회장직을 하며 미국인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어졌다. 미국인 커뮤니티 내의 두 인싸가 세력 다툼을 벌인 이야기부터 꺼내 주는데, 어찌나 재미있던지 킴의 영어가 한국어로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꺼내 보는 내 이야기. 킴이 오늘은 한국인이라 치면, 한국인에게 한국 커뮤니티 욕해도 되잖아 싶다. 미국인에게 한국 커뮤니티 욕하면 부끄럽다. 커뮤니티 가입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율인데, 규칙적으로 모임을 하고 회비를 걷고, 독일 도착한 순서대로 회장, 부회장을 뽑는다. 단톡방도 꼭 참여해야 하는 분위기다. 회장 안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회장 감투를 쓰게 되면 억울하기 그지없는데, 사실 회장 되어봤자 하는 일은 내 아이 학교 일이다. 그 자리를 천하게 여기니, 감투 쓰는 것이 나쁘지 않은 나는 이상한 존재 같이 느껴진다.
사람 사는 게 다 같아. 미국 커뮤니티는 사람이 더 많잖아. 더 난리라고.
한국인이라서 유난히 더 그런 것도 아니야.
킴이 느긋한 말투로 해주는 영어가 나에게는 치유로 다가온다. 또 고맙다.
어둑한 놀이터에서 시간을 잊고 뛰어놀던 큰 아이. 켈리 덕에 나를 찾지 않는 작은 아이. 킴과 나눴던 웃음과 눈물. 하얀 테이블 위에 놓였던 화이트 와인. 마음속 사진기 셔터를 눌러 저장해 본다.
땀 때문에 이마에 잔뜩 달라붙은 머리를 한 작은 아이가 졸린 눈으로 테이블에 온 시각이 10시가 넘었던 것 같다. 완전히 깜깜하다. 각자의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다. 킴은 레스토랑에서 먼 호텔 동이라 차를 가져왔다. 못 보던 차다. 킴의 남편이 차를 새로 장만했는데, 킴이 아이들과 먼 길 나선다고 남편이 내어주었다고 했다. 어둠 속에서도 폭스바겐 티구안이 파랗게 빛난다.
화이트 와인을 한잔 마신 킴이 후진을 하다, 바퀴 절반 높이의 놀이터 턱에 티구안의 뒤 범퍼를 들이받는다. 남편의 새 차라고 말한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티구안은 헌 차가 되어버렸다.
"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봐. 운전이 이렇게 서툴잖아."
멋쩍은 킴이 창문을 내리고 말한다.
뒷문장은 안 들리고 앞문 장만 가슴에 와서 박힌다.
한국인이라고? 방금 그녀가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말했지?
글을 쓰며 돌이켜 보면, 뒷 범퍼를 들이 박은 난처한 순간에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무의식에서, 진심에서 나온 말이라 여기고 싶다. 아귀다툼을 하든, 운전이 서툴든 킴과 나는 한 울타리 속에서 시간과 감정을 공유하는 관계였으니 꽤나 친해졌다고 서로를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킴은,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칭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킴의 남편 속은 쓰렸겠지만, 나에겐 그날 중 제일 좋은 시간이었다. 킴과 함께했던 시간들 중에서 제일 좋은 시간이었다. 킴이 후진하다 범퍼를 들이받은 순간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