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가 왔다는 말에 본인 탓이라고 하던 친정 엄마는 코로나라는 말에는 오히려 담담했다. 담담할 수밖에 없던 것이, 이미 증상이 심하던 때에는 아무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아 지나가버렸다. 게다가 격리를 집에서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 안심했다. 엄마도 나도 공황장애라 갇힌 공간에서 격리된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상황이니까 말이다.
엄마의 공황장애는 화병이라고 이름 지어지기도 했었다. 공황장애는 여러 가지의 모양을 띠는 것 같다.
친할머니는 나와 엇비슷한 40대에 증상이 발발했는데, 주변 이웃들의 추천은 첫 번째 출산이었다. 말도 안 되지만, 출산하면 열린 뼈가 제대로 끼워 맞춰지면서 공황장애 증상들, 예를 들면 어지럼증이나 기분저하 등의 증상이 사라진다고 했단다. 그렇게 넷째인 막내 고모를 출산했다. 결과는 좋아질 리가 없다.
할머니의 증상은 더 심각해졌고, 할머니의 시어머니이신 증조할머니는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중학교 수학 선생님이셨던 할아버지도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으셨나 보다. 한평생 종교도 신도 모르고 사셨던 분이셨는데 와이프의 화병에는 도리가 없었겠다. 할머니는 종종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쁘고, 어지러워서 누워있어야만 하는 증상이 있었다. 대중교통은 물론이고 승용차로 이동도 힘드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할머니에게 붙어진 병명은 정체불명이라 그저' 화병'이라 이름 붙어졌다. 할아버지의 동생들, 그러니까 작은할아버지들이 넷이었다. 중학교 선생 월급봉투에 매달리고 있는 식구는 자그마치 10명. 증조할머니, 작은할아버지들, 그리고 네 남매의 살림을 해내야만 했다. 할머니는 본인 아들의 도시락을 싸며, 남편의 막냇동생 도시락을 쌌다. 100살까지 사셨던 증조할머니의 병시중을 집에서 했다. 증조할머니는 집에서 돌아가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나 엄마는 같은 병을 얻게 된다. 엄마가 자신의 발로 종합병원의 정신신경의학과에 걸어 들어감으로써 병에는 새로운 이름이 달린다. 공황장애로 인한 불안과 호흡 불균형 증상.
"뇌에 감기가 들었다 생각하세요."
엄마의 첫 담당의사분이 꽤나 괜찮으신 분이었나보다. 엄마는 뇌의 감기약을 받아왔지만, 먹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정신병약이니까 말이다. 그랬다고 한다라고 어미를 쓰는 이유는 엄마는 이 모든 과정들을 혼자서 앓고 해결했기 때문이다.
엄마의 발병으로부터 정확히 10년 후에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내게도 왔다. 이미 독일에서부터 전조증상은 있었지만,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다 섬광처럼 엄마의 10년 전이 계속해서 스쳐 지나갔다. 아, 나에게도 찾아왔구나.
엄마에게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동생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은 엄마에게 전달해버렸고, 엄마는 조용했다. 공황장애 환자에게 이보다 더 비극적인 소식이 어디 있을까?
엄마가 미리 앓아봤으니, 어떻게 대처할지 어떻게 이겨나가야 할지 말해주기 쉬울 수도 있다.
또는 아직은 완치되지 않아 함량이 낮은 약을 먹고 있으니 엄마도 여전히 환자라면 사실 우리는 서로 공통분모를 가진 끈끈한 엄마와 딸이 될 수도 있을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연락이 없었다. 아주 고요했다.
심각한 공황장애 증상에서도 인지는 말짱하기에, 엄마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엄마 탓이라고 생각하는구나.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같은 병을 앓고 있다면 우리는 동질감을 통한 연대를 맺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란 가족 이외의 타인에만 해당된다. 공황장애가 유전이겠는가? 그리고 혹여 유전이라면 친할머니에게서 왔다고 시어머니 탓을 좀 하면 안 되나? 남 탓이 안 되는 엄마는 자신을 부시고, 자신을 괴롭히는 병을 끌어안고 십 년을 괴로워다.
이제야 엄마를 이해하는 순간이 왔건만, 우리는 함께 불행했다.
나의 병을 외면하니 섭섭했고, 엄마는 본인 때문에 괴로워하는 나를 외면하고 싶었다.
동생과 가까운 종합병원인 가톨릭대 응급실로 갈 날을 잡았다. 가기 전날 저녁, 남편은 내 병이 본인과 결혼한 탓이며, 시댁 때문이라고 단정 짓더니 자책을 하기 시작했다. 내일 병원 갈 때까지 이 밤을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고통의 골짜기는 한없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때 울리던 전화.
" 엄마가 지금 너네 집으로 가는 중이야."
" 엄마, 부탁인데 지금은 도저히 만날 수 없으니 돌아가 줘."
남편에게 당신의 탓이 아니라며 울며 불며 사정하고 있던 한가운데에서 엄마의 얼굴을 마주할 순 없는 노릇이다.
엄마는 울기 시작했다. 나의 병이 가장 심한 상태인데, 나를 위한다는 사람들을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내가 나아지는 수밖에 없나 보다. 보이지 않는 곳이 아프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공황장애의 난리통에서 벗어나자마자 이번엔 코로나가 찾아왔다. 엄마는 담담하다. 부지런히 반찬을 해서 집 앞에 새벽 배송처럼 배달해 나르기 시작했다. 뭔가를 할 수 있음이 엄마를 안심시키나 보다.
격리가 끝나자마자, 엄마를 불러 아이들과 미도산으로 산책을 갔다. 엄마의 도움으로 나는 이렇게 말짱하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미도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가톨릭대 병원 본건물이 잘 보인다. 가톨릭대 응급실과 정신의학과를 가니라고 이젠 눈에 익은 신관 뒤편에는 낡은 오렌지색 구관이 있다. 건물에 붙은 글씨로 보아 지금은 의과대학동으로 쓰이는 것으로 추측된다.
엄마는 이모의 장례식을 찬찬히 그려냈다. 25년 전 그날이 지금 산아래 펼쳐져 있는 듯이 엄마의 마음속에 찍어둔 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 구관 뒤편 장례식장이 허름하고 작았어. 강남 한복판 병원이라는데 바닥에 거적처럼 깔아 두고 천막을 치고 상갓집이 열려있더라. 이모부 손님들은 꾸역꾸역 계속 밀려들어오는데 엉덩이 붙일 자리도 하나 없어서 힘들었어. "
언니의 발레학교 졸업공연을 위해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으로 불과 며칠 전에 출국한 이모는 돌아오지 못했다.
언니의 발레 공연을 보다 잠자듯이 숨을 거둔 이모의 사인은 아직도 알 수 없다. 소련에서 화장 절차를 거치고 나서야 이모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모는 시신으로는 한국에 돌아올 수 없어, 엄마는 이모의 가는 길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엄마는 허무함에 사무쳐 두고두고 이모의 이야기를 한다. 이모가 언니의 공연을 보던 날도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얼마 많지 않았을 테다.
여성의 날이다. 여성이라고 한테 불려지기엔 여성들 한 명 한 명은 스토리로 가득한 제 각각의 인생을 살아가다, 멈추기도 넘어지기도 그렇다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할머니의 이야기도, 엄마의 이야기도, 이모의 이야기도, 이모를 여읜 언니의 이야기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여성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기꺼이 키보드 앞에 앉을 테다. 모두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된다. 우린 모두 이야기보따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