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을 보러 가니 딸아이 입이 딱 벌어진다.
"엄마, 한국 너무 좋아. 영화관 대박이야."
프랑크푸르트를 비롯한 런던 등의 유럽 영화관은 지저분하기 그지없는데, 깔끔함이 당연한 한국의 멀티플렉스에 아이가 반했다.
아침 9시, 마치 전용 영화관인 양 사람 없는 한산한 코로나 영화관. 주변 이들이 동지 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팝콘을 먹지 못하는 것만 빼고는 코로나 영화관은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재벌이라도 된 기분이다. 코로나로 가지 못했던 도서관에 다시 열리고 아이들의 도서관 회원증까지 빌려가면서 10권이 넘는 책을 빌려 오던 날처럼 드문 드문 비어있는 영화관은 행복이라 부르고 싶다.
아토피가 심한 나에게 닥친 삼시 세끼와 설거지로 손은 거북 등보다 더 거칠다. 벌겋다 못해 굳은 피부가 벌어져 찢어져 피가 나기 일수다. 손이 이 지경인지가 2년이 되어 가지만 이보다 혹독한 것은 영화관에 가지 못하고, 도서관이 문을 닫는 일이었다.
대륙을 건너서도 놓지 않은 것, 그리고 유럽 대륙에서도 어딜 가서든 기회만 된다면 달려간 곳이 영화관이었다. 일본 영화 상영이 불법이던 시절 총학생회에서 빌린 낡은 체육관에선 링이 상영된다. 맨 뒷자리에서 보다 자꾸 뒤를 돌아다보며 뒤통수를 긁적거리던 20살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아이들도 영화를 즐겨주길, 제발..'이라 생각했다. 영화 보러 가는 엄마, 함께 봤던 영화들, 영화관 밖에서도 맡을 수 있는 고소한 팝콘 냄새와 집중해서 화면을 보니라 노곤해진 몸으로 엄마를 기억해주길 비는 마음이다.
그리고, 영화. 스파이더맨은 특별한 영화다. 주재원의 시간은 빠르게 감기로 돌아가는 듯하다. 부서져라 시간과 정신을 갈아 넣던 시간 중에 숨을 돌리는 순간은 영화관을 가는 날이다. 빠르게 감기로 가다 보니 흘러가는 시간도 빠르게 머릿속에서 달음박질쳐버린다.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2019년 마침 우리 가족의 주재 마지막 해에 개봉했다. 나를 위해서 만들어준 걸까? 소니가 내가 유럽에 있음을 알고 있는 걸까? 뉴욕을 떠난 피터 파커가 유럽으로 수학여행을 온다.
피투성이의 피터가 해피를 소환하던 그 튤립밭에서 울보 등판이다. 어느 면에서 우는 것이냐고 묻는 다면 한마디로 답할 수 없는 순간이다.
파리로의 부활절 휴가를 반쯤은 망치다 시 피했다. 첫 여행이 망해도 그리 망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날 잡고 파리로의 첫 여행을 써야 할 텐데, 아직도 돌아보기 유쾌하진 않다. 서걱서걱 칼을 갈았다. 다신 망하지 않으리. 배움이 빠른 호박씨라 자부하고,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네덜란드에선 망하지 않으리.
쾨켄호프 Keukenhof에서 꽃 축제가 열리면 유럽의 봄이 왔다고 한다. 매년 32만 제곱미터의 유럽 최대 정원을 튤립, 히야신스 등의 각종 구근과 온갖 꽃의 새로운 테마로 꾸며낸다. 우리 집 정원 가듯 쾨켄호프도 방문하고, 에버랜드 축제 즐기듯 아이들과 가서 즐거운 시간 보냈다고 아름답게 호박씨의 주재원 여행기를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 진실은 이러하다.
네이버 블로그에 한국 여행객들의 정보를 몇 시간이고 살피고 3,4개쯤은 출력하고, 줄 그어가며 공부한다. 쾨켄호프 홈페이지에 들어가 미리 입장권을 사두면 할인해준다는 정보를 확인했다. 홈페이지 들어가서 두근두근 해외 결제도 해본다. 입장권을 뽑아 투명 파일에 보관한다. 숙소 정보도 이 파일에 저장해둬야 한다.
길과 숙소를 챙겨야 한다. 암스테르담에서 35km 떨어진 리세 Lisse이기에 리세 가까이 콘도형 숙소를 예약해둔다. 무엇을 사든 헉 소리 나는 네덜란드이지만, 숙소는 비싸도 너무 비싸다. 후에 네덜란드는 캠핑으로만 다시 방문했다. 남편의 호텔 마일리지가 아니고서는 들어서 이름을 알 법한 숙소는 잡은 적이 없다. 알뜰한 남편에게 부응해주는 때였다. ibis 같은 비즈니스 급에만 가도 좋겠다 싶은 생각을 하곤 했다. 저렴하게 간 여행이었으니, 남들 한 번 갈 때, 우린 두 번 가야지 하며 위안 삼았다.
그렇게 나를 갈아 넣은 여행. 쾨켄호프 따윈 필요 없다. 리세에 도착하기만 해도, 숙소에서 잘 자기만 해 행복함이 밀려온다.
그런데, 암스테르담에서 리세의 숙소까지 가는 길은 무지개 색이다. 밭을 가득 메운 튤립에 울컥했다. 튤립은 향이 없다시피 하다. 자동차 창을 여니 겨우내 흙 위로 머리를 내밀고 마침내는 빛나는 꽃을 피운 튤립 구근의 땀내가 그득하다.
" 집에 도로 가자. "
남편이 어이없어 쳐다본다. 쾨켄호프가 뭔 소용인가. 입장료 내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이 순간은 여기서 마침표 찍어도 된다 싶다. 지나가는 자동차에 가볍게 흔들리는 튤립들이 하늘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세상 가득 서있다. 나도 이리 살아야지. 찬란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부드럽고 꼿꼿하게. 튤립처럼 유럽에서 살아볼 테야. 무지개 튤립 밭이 나를 응원해주잖아.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경이로운 튤립밭들을 잊고 지냈다. 우리의 주재는 4년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잘 지낸 덕에 1년을 주재가 연장되었다. 그 1년도 잘 지내, 1년을 더 지낼 수 있을 정도로 우린 누가 봐도 주재를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2019년 번 아웃인지 향수병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스며 왔다. 산 꼭대기에 올랐는데 그 꼭대기엔 아무것도 없더라. '꽃들에게 희망을 속' 애벌레처럼 삶의 답이 없음을 모르고 애벌레의 털이 닳고, 피가 흐르는지도 모르고 거친 바닥에 배를 비벼가며 위로 위로만 향했다.
잊고 지냈던 쾨켄호프를 2019년의 시작에서 스파이더맨이 보여주었다. 해피의 비행기가 아무 곳에나 착륙하는 바람에 튤립밭은 무지개 색 꽃바람이 비행기와 피투성이 피터 파커를 휘돌아 감는다. 위로 위로만 향하면 무엇이든 있을 줄 알았는데, 꼭대기에 서보니 아무것도 없더라. 그래서 밟은 애벌레들 사이로 내 몸을 던져 버린데도 그 또한 삶이다. 천천히 애벌레 무리에서 기어 나와 번데기를 만들고, 나비가 되어 날아가기 위한 일상이다. 과정이 전부임을, 일상 속에서 부단히 주변 인연과 삶을 사랑하고 살아야 하는 노력이 전부님을 오늘도 되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