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올라가면, Edeka 슈퍼, Rewe 슈퍼 전단지를 부지런히 살폈다. 납작 복숭아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큰 아이 임신을 했을 때도 여름의 시작부터 끝까지 복숭아로 끼니를 연명했을 만큼 복숭아가 좋다. 납작 복숭아는 맛있는 과일 찾기가 쉽지 않은 독일에서 선물 같은 존재다.
그녀가 그날 내게 복숭아를 내밀었다. Primary 국제학교 유치원 정문 건너편 타우누스 산자락에서 그녀가 내민 복숭아는 베어 물지 않아도 씁쓸할 것이라 여겨졌다. 그녀는 내게 당장 먹어보라 권했다. 복숭아를 씻어, 비닐에 담아 도넛 복숭아라며 별명까지 말해주며 내밀었건만, 그녀 앞에서 먹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주재 법인은 회사의 축소판이다. 다 자란 벚나무 아래 자라는 아기 벚나무도 잎과 가지가 있고, 꽃도 피듯 해외 법인은 작은 형태의 기업이다. 남편 회사는 L사 대기업이 모여있는 프랑크푸르트 시내 업무지구인 Niderrad지역에 위치했다. 남편의 회사는 5년 전 L사에서 분사를 했지만, L사 유럽법인과 여전히 얼굴을 맞대어 사무실을 쓰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L사 연구직이었다. 내 남편은 L사에서 분사한 규모가 작은 기업에 다닌다는 사실에 그녀의 목에는 힘이 들어갔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남편이 남편 사무실과 얼굴 맞대고 위치한 모기업에 다니고 있음에 그녀에게 잘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작은 아들과 아들, 그리고 일명 구멍이라고 불리던 한국 남자애 이렇게 총 3명이 유치원 같은 학년의 한국인이었기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게다가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늘씬한 TK 미인이다. 누가 봐도 동그랗고 시원한 눈이 예쁜 그녀다. 호박씨는 예쁜 여자랑 친해지길 참으로 좋아한다. 사람이든, 아니든 이쁘장한 것을 보면 곁에 있어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녀는 독일에서 첫 번째 인연이었다. 예쁜 그녀가 그녀의 집으로 아이들과 나를 초대해줘서 기뻤다. 그녀가 울 듯한 목소리로 전화해 우리 집을 찾아와서 좋았다.
큰아이 학원비를 ATM 기에서 현금으로 출금하고는 돈은 챙겨 오지 않았다고 했다. 정신없으면 그런 일도 있는 법인데, 똘똘하다고 자부하는 그녀는 머리를 벽에 쥐박고 싶어 했다. 여느 때처럼 아이들이 좋아하는 닭백숙을 끓이고 있었다. 당시 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요리였다. 그녀가 전화를 했다. 지금 집 앞인데 아이들을 데리고 가도 되냐고 물었다. 백숙을 끓이기 시작한 저녁시간이었고, 그녀와 두 아이들이 와서 닭 한 마리를 함께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웠다. 내가 담근 김치도 잘 먹는 그녀의 큰 아들도 예뻤고, 큰 아들의 살이 걱정되어 닭백숙을 퍼먹는 아들에게 내내 핀잔을 하는 그녀가 좋았다. 어리석고 바보 같다며, 보이스 피싱당한 노인처럼 자책을 하며 우리 집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는 그녀를 보면서, 우린 진짜 친구인가 보다 했다.
그녀를 위로해주려고 큰 아이 임신 전, 혼전 계류 유산된 아기에 대해서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남편과 나 외에 나의 계류 유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좋았고, 대륙 건너 유럽에서도 이리 인복이 많아 남은 시간들은 충만하고 따뜻하겠다 싶었다. 머리를 쥐박고 싶었던 내 생의 순간을 그녀에게 내보이며, 괜찮다고 토닥여 주었었다.
겨우 장만한 호박씨 명의의 중고차 A3를 끌고 독일어 학원을 가봐야겠다 생각했다. 학원 주변 공영 주차장을 찾아서 한인 미장원이 위치한 좁은 골목으로 차를 끌고 들어갔다. 차간 거리를 재면서 진입해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우디의 사이드 미러는 왼쪽 길가에 주차되어있던 픽업트럭 문에 받쳐 너덜거리고 있었다. 액셀에서 발을 떼는 데에 걸리는 1초 사이에 사이드 미러는 운명을 다했다. 픽업 트럽 주인은 당황한 얼굴로 운전석에 앉은 나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그의 트럭은 흠집 하나 없었다. 게다가 A3는 연식이 5년이나 지난 중고차였다. 차를 오른쪽 길가에 대고 펑펑 울 시간과 여유가 주어졌다.
진정이 되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럽은 신차 매장에서 중고차를 다룬다. 중고차 판매는 물론, 사고 수리까지 신차 매장에서 총괄한다. 사고 난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아우디 매장을 남편이 생각해내더니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크론벡 아우디 매장이었다. 차를 끌고 오라는 대리점 직원의 서툰 영어에 덜겅거리는 사이드미러를 붙들고 차를 몰았다. 크론벡으로 향하는 타우누스의 울창한 숲길에서 달달 달거리는 사이드 미러 소리를 들으며 운전해가니 견적은 얼마나 나올까 또는 고칠 수는 있는 걸까 등등의 다양한 생각들이 숲을 따라 떠올랐다.
차 값이 2천만 원 정도였는데, 사이드미러 수리비가 500만 원이었다. 사이드미러 수리는 2주 후에 가능하며 수리는 총 한 달의 기간이 걸린다고 했다. 말이 되는 소리인가 하겠지만, 참말이다. 그러니, 유럽에서 운전하려면 사고는 없으시길 진심으로 빈다.
대중교통으로 크론벡에서 우리 집이 있는 오버오젤로 오는 것은 까다로운 편이다. 1시간에 한대 정도 다니는 시외버스를 찾아 타거나, 프랑크푸르트 시내로 들어갔다가 오버오젤로 갈아타 나오는 1시간여의 기차 편이 있다. 차로는 10분 거리다. 지금 내가 위치하는 서울에서 생각한다면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독일 도착이 반년도 안된 때라, 수리를 맡기고 나면 어찌 집에 돌아와야 하나를 고민했다.
그녀를 떠올렸다. 크론벡 아우디 매장은 부촌인 Konigstein에 위치한 그녀의 집에서 멀지 않다. 내겐 친구가 있다. 덜덜 거리는 사이드 미러를 달고 학교 주차장으로 와서 아이들을 픽업하기 전 유치원 카페테리아에 앉은 그녀에게 오늘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 언니, 저 다다음주 오전에 차 수리 맡기고 나면, 저 좀 데리러 와 주실 수 있어요? 라운드 어바웃 Round about에 있는 아우디 매장 아시죠? "
" 나 매일 그 시간에 산책 가거든. 안 되겠는데. "
밤늦게 퇴근한 남편이 차에 매달려 있는 사이드 미러를 보더니 아무도 안 다쳤으니 됐다고 했다. 남편에게 차 수리를 맡기는 날 잠시 나와 집에 데려다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녀에게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는 말도 했다. 남편 회사의 모기업이었던, L사 주재원 와이프인 그녀를 남편과 나는 TK 언니라고 불렀다. 친구가 되어가고 있는 그녀와의 스토리를 남편과 공유하곤 했다.
" 산책 가야 해서 나를 집에 데려다주는 것은 안된데. 10분 거리인데.... 여보."
".... 점심시간에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렵긴 한데, 꼭 나올게. 아우디 매장에서 나를 기다려야 할 수도 있어."
2주 후, 아우디 매장에 차 수리를 맡기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은 30분 거리의 프랑크푸르트 사무실에서 그제야 출발할 수 있다 했다. 아우디 매장에서 크론벡 시내까지는 걸어서 20분 거리인데, 외곽의 대로에는 행인이 없는 편이다. 아무리 작은 차라도 자차를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외곽의 독일인의 라이프 스타일이다. 대중교통이 불편한 탓인데, 인구 밀도가 낮아 도로를 닦아 두는 것이 대중교통편을 놓는 것보다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걷는 이 하나 없는 소슬한 동네 길을 걸으며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도 이 시간에 산책을 하고 있을 테지. 남편이 사무실에서 크론 벡으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걸어 나가며, 그녀를 떠올렸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한국말이 들렸다.
" 한국인이세요?"
바닥을 보고 걷다 고개를 들어보니, 중년의 한국 여성이 내 앞에 있었다.
" 네."
" 힘들어 보여요.. 괜찮아요?"
초면에 당황스러운 질문이다. 뭐라 답해야 할까?
" 저는 독일 온 지 5년 정도 됐고요." 라며 중년의 여성은 말문을 연다. 그리곤 힘주어 말해준다. 독일에서 잘 살려면 혼자 있지 말고, 한국인들을 만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야 한다고 한다. 물론 이 여성의 이야기는 어김없이 한인교회에 나가면 된다고 마무리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친구라고 여겼던 이의 차가움이 독일 날씨보다 더한, 이기적인 인간이라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말하고 싶었다. 독일 라이프의 첫 인연인 그녀를 싫어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가 나에게 다정했으면 좋겠다고 길에서 마주친, 처음 보는 한국인에게 한국어로 털어놓고 싶었다.
가만히 그 중년 여성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니 내 손을 한 번 잡고는 오던 길을 가더라.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내 위치를 설명하고 그를 기다렸다.
부랴부랴 나를 집에 내려준 남편은 점심도 거르고 회사로 향했다. 아이들을 데리러 갈 시간이 되었길래, 나 또한 점심을 거르고 유치원으로 향했다. 유치원 입구로 걸어 향하는 내게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다.
" 어디야? 나 얘들 데리러 좀 일찍 왔어."
그녀의 폭스바겐 티구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내민 납작 복숭아.
" 이거 먹어본 적 없지? 자기 줄라고 싸왔어."
고맙다고 해야 한다. 내게 맛난 것을 주려고 씻어 싸온 L사 연구원 부인에게 감사를 전해야 한다.
귀한 것을 나를 위해 준비해 갖다 준 주재원 사모님께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납작 복숭아는 한국에서는 나지 않는다. 독일에서도 독일산은 아니고 스페인이나 프랑스, 북아프리카처럼 따뜻한 지방에서 재배되어 철이 되면 독일로 운반되어 온다. 이르면 5월이면 맛볼 수 있고, 아무리 늦어도 9월 전에는 자취를 감춘다. 백도처럼 딱딱한 것도, 황도처럼 달콤한 과즙이 줄줄 흐르는 것도 마음에는 쏙 든다.
그녀와의 인연은 해피엔딩 하고는 거리가 먼 편이었으나, 독일 슈퍼 매대의 납작 복숭아를 만나면, 복숭아를 반길 뿐 그녀를 떠올린 적은 사는 내내 단 한 번도 없었다. 얘들을 일찍 데리러 왔다며 나에게 그녀가 복숭아를 건네던 그날, 복숭아만큼 그녀를 향했던 달콤한 마음은 자취를 감춰버려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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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 Nighthawks, 1942